
欅坂46 - 二人セゾン (Keyakizaka46 - Futari Saison)
(※ ‘가면라이더 포제’의 일부 스포일러가 있으나 ‘가면라이더 포제’ 본편과 관련 없는 설정 및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미행 혹은 스토킹에 대한 가벼운 묘사를 담고 있습니다. 본 연성은 해당 범죄를 미화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첫눈
「♬ IZ*ONE – 앞으로 잘 부탁해」
류세이는 거리 한복판에 서서 손목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약속 시각까지는 15분도 훨씬 넘게 남았건만, 어째서인지 일찍 나오게 되었다. 오늘은 토모코와의 역사적인 첫 데이트 날. 잠든 건 오전 6시가 넘어서였고, 약속 시각 2시간 전부터 깨서 1시간도 넘게 준비를 했다. 왜 늦게 잤냐 하면 지극히 당연하게도 잠이 안 와서였다. 토모코와 사귀고 난 후 첫 데이트라는 걸 생각하니 도통 잠들 수가 없었다. 평소 자던 자세로 자도 잠은 오지 않았고, 반대 방향으로 자도 마찬가지였다. 몇 분을 뒤척이던 류세이는 신경질을 내다가 이불을 걷어차면서 침대에 앉았고, 그 상태로 명상이나 하다가 잠들자고 마음먹었다. 고심 끝에 떠올린 해결책이 그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에 집중하려던 순간, 토모코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토모코……. 상상만 해도 귀여워서 류세이는 배시시 웃어버렸다. 얼른 표정을 거두고 집중을 하려고 했으나, 어떻게 해도 토모코의 모습이 떠올라서 평정심을 되찾을 수 없었다. 밖에라도 나갔다가 올까 생각도 했지만, 밤공기는 매섭게 찼다. 나갔다가 잠이 오히려 깨면 1시간도 못 잘 게 뻔했다. 어리석은 자신을 탓하며 류세이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양을 세보기로 했다. 양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어라, 토모코, 거기서 뭐 해?
“으아악!”
류세이는 퍼뜩 눈을 떴다. 그리고는 벽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순간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양을 치는 토모코가 떠올랐다. 류세이는 마른세수를 했다. 드디어 사고회로가 어떻게 된 건가? 어떻게 된 게 아니라면 저주라도 당했나? 하지만 이렇게 행복한 저주가 세상에 있을 리 없었다. 몇 시간을 침대 위에서 헤매던 류세이는 무술가가 숙지해야 할 마음가짐을 떠올리고 나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때가 오전 6시였다.
비록 평소보다도 훨씬 적게 잤지만, 알람이 울리기 2시간 전에 류세이는 일어났다. 자면서도 데이트 생각을 한 건지, 꿈속에서 데이트가 대차게 망하는 꿈을 꿨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류세이는 그것이 꿈이란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류세이는 퀭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준비를 시작했다. 꿈속에서 데이트가 망해버린 이유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첫 데이트부터 지각해서 토모코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처참한 몰골이 들키지 않게 샤워와 양치까지 마치고 온 류세이는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상태에 만족했다. 음, 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겠지. 생각하면서 옷장을 열자마자 류세이는 절망하고 말았다.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매일 입던 옷뿐이었다. 나름 패션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데이트 아닌가. 늘 입던 옷을 입고 나가도 되는 걸까?
류세이는 평소 셔츠에 재킷, 그리고 긴 바지의 조합을 선호했다. 겨울에는 그 위에 코트를 입는 게 다를 뿐이었다. 가장 무난한 스타일이었지만 특별한 날이니 다르게 입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더 사둘걸. 고등학생이라 지갑 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지만 옷은 사두면 얼마든지 입을 수 있지 않은가. 한숨을 길게 내쉬다가 결국 평소 입던 그대로 입고 거울 앞에 선 류세이는 2차 난관에 봉착했다. 이번에는 머리 스타일이 문제였다. 휴일에 외출하는 경우에는 늘 머리를 반 정도 까고 다녔지만, 그건 자기가 원해서 한 헤어 스타일이었다. 토모코가 그것까지 좋아할지는 미지수였다. 류세이는 빗과 헤어 드라이기, 그리고 왁스를 들고 와서 이리저리 앞머리를 바꿔 보았지만 영 탐탁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들한테 물어볼 거 그랬나. 류세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친구라는 것들이 호락호락 자신을 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중에서 연애나 제대로 해봤는지 의문인 녀석도 한둘이 아닐 터였다. 그뿐인가. 어쩌면 토모코에게 가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을지도 몰랐다. 류세이는 저기압이 되어 빗을 내려놓았다.
‘케 세라 세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했던가. 데이트가 망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괜찮았다. 토모코가 느닷없이 자신은 사실 구세의 마녀라면서 류세이에게 마왕을 잡는 용사가 되어 달라고 말해도 마왕을 잡으러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류세이는 지친 얼굴로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류세이는 마주치는 가게의 쇼 윈도우 앞에서 멈춰서서 계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뻣뻣한 얼굴로 쇼 윈도우를 마주하는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한 번은 가게 주인이 나와서 안으로 들어올 거냐고 넌지시 묻는 바람에 더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도착하고 보니 시간이 한참 남게 되었다.
10분 정도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류세이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의 손목시계와 거리 중앙에 있는 성 모형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5분 전이었다. 약속 시각까지 여유가 있었으나, 류세이는 토모코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토모코는 아침에 유독 일어나기 힘들어했다. 등교할 때마다 축 처진 표정을 하던 토모코를 떠올렸다. 느긋하게 기다리자. 류세이는 자신을 달랬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데 누군가가 류세이의 어깨를 쳤다. 놀라서 돌아보니 숨을 몰아쉬고 있는 토모코가 있었다.
“안 늦었죠? ……다행이다.”
류세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시계를 바라본 토모코가 옅게 웃었다. 뛰어왔는지 숨을 가쁘게 쉬던 토모코가 옷을 탈탈 터는 시늉을 했다. 언제나처럼 검은 리본이 달린 머리띠와 검은 케이프와 원피스에 검은 스타킹, 그리고 검은 가방까지. 어둠 속에서 만난다면 동화 속 세계에서 튀어나온 요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류세이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는데 위험하진 않았고?”
토모코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전에 토모코가 다크 네뷸라(실은 M-BUS였지만)에 끌려간 이후로 류세이는 남들이 보기에 과보호라고 느낄 정도로 토모코의 신변을 걱정했다. 그런 일이 줄어든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조디아츠도 결국 사람이 변한 것 아니던가. 류세이는 남모를 근심에 빠져들었다. 토모코가 류세이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랑 만나긴 해도, 위험한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것보다 잠은 잘 주무셨나요?”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에 류세이는 흠칫 떨었다. 어제 새벽 늦게까지 잠이 안 와서 끙끙 앓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감이 좋은 토모코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류세이는 고민하다가 아주 조금 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그 말에 토모코가 안심한 듯 굳은 표정을 풀었다.
“사실 저도 잠을 못 잤거든요. 오늘이 기대돼서.”
기대된다는 말을 하면서 환히 웃는 토모코의 표정에, 류세이는 잠시 넋을 잃었다. 남들보다 어둡긴 해도, 그게 마음속까지 어둡다는 뜻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과 보내는 시간이 기대돼서 잠을 못 잤다고 수줍게 말하는 게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류세이는 어쩔 줄 몰라 말을 더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추운데 우리 일단 들어갈까? 내가 알아둔 레스토랑이 있거든.”
레스토랑이라고 해봤자, 학생들이나 가족들이 많이 찾는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는 탓인지 커플이나 가족 관련 이벤트가 많은 덕분에 류세이는 그곳을 골랐다. 토모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류세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곧 눈이 오려는지 하늘은 꾸물거렸다. 해가 났다면 더 기분이 났을 테지만, 이대로 눈이 내려도 꽤 기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류세이는 그게 날씨의 문제가 아니라 같이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토모코의 손을 바라보았다. 사귀는 사이에는 원래 손을 잡던가? 잡을 때는 꽤 자연스럽게 잡던데, 그건 어디까지나 드라마나 영화 속 이야기였다. 멋대로 잡으면 놀라지 않으려나. 류세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손, 잡아도 될까?” 하고 묻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돌려 말할 필요가 전혀 없는 문장이었으니까. 문제는 말하다가 긴장해서 혀라도 씹어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겨울이고, 추우니 입이 얼었다고 반박하면 되지만 토모코라면 거짓말을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허공에서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다가 슬쩍 움직이려던 류세이는 토모코의 새파래진 안색을 보고는 멈춰 섰다. 그리고는 마른세수를 하며 똑같이 멈췄다.
“토모코……. 설마 너도…….”
“류세이 선배도 느끼셨어요?”
류세이는 대답 대신 눈을 날카롭게 떴다. 둘은 동시에 뒤쪽을 흘겨보았다. 누군가 급하게 숨는 듯한 발소리와 숨소리가 들렸다. 토모코의 영감이나 겐타로의 직감에 비하면 비할 바는 못 됐지만, 수상한 인기척을 알아차리는 것은 결코 겐타로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겐타로보다 앞서면 앞섰을 것이라고 류세이는 생각했다. 게다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인물이 아닌 일반인의 기척이 하나도 아니고 다수. 토모코는 손을 모으면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류세이가 이를 갈았다.
“이것들이 진짜……. 남의 데이트 망치려고 작정했나.”
“제 탓이에요. 류세이 선배랑 데이트한다고 유우키 선배한테 말했는데……. 죄송해요.”
토모코는 풀이 죽은 얼굴을 했다. 류세이는 급하게 토모코의 탓이 아니라고 했다. 좋아서 친한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미행하는 쪽이었다. 물론 저쪽도 궁금해서 한 거겠지만, 할 짓이 있고 안 할 짓이 있지 않은가.
“허, 그나저나 이렇게 미행을 어설프게 하는 경우는 처음 봤네.”
경계하듯 뒤를 바라보는 류세이를 보고 토모코가 넌지시 물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다음에 만날까요?”
“아니! 그, 그건 절대 안 돼!”
류세이는 꿈속에서 데이트가 망한 것을 떠올렸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지구가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차라리 따라오라고 하고 적당한 곳에서 떼어두는 게 어떨까. 류세이의 제안에 토모코는 긴가민가했다. 류세이는 급하게 덧붙였다.
“여기서 돌아가면 아깝잖아. 그렇지?”
“그렇…… 죠?”
“응. 그리고 모두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는 거야!”
“……예. 예?”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는 거지!”
“저희…… 부원들이랑 싸우고 있었나요?”
역시 무리수였다. 류세이는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찌 되었든 여기서 돌아갈 수 없다는 의견엔 변함이 없었고, 토모코도 동의하는 듯했다. 결국, 둘은 계획했던 대로 레스토랑으로 가기로 했다. 방금까지 고민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류세이는 헷갈렸다. 아, 그래. 손 잡는 거. 류세이는 다시 토모코의 손을 바라봤다. 천천히 하자, 천천히.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성급하게 굴었다가는 토모코와의 거리가 더 멀어질 수 있었고, 더욱이 토모코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앟았다. 그렇게 포기하려던 찰나, 류세이의 손을 토모코가 붙잡았다. 토모코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류세이가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리자, 토모코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놓을까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류세이는 대답하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좋아서 실룩거리는 입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뒤에서 강렬한 눈빛이 느껴졌지만, 류세이에게 그것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레스토랑은 처음 약속 장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고, 차도 대신 광장으로 이어지는 거리의 길목에 있었다. 거리에는 여러 옷가게와 소품 가게, 그리고 액세서리 가게가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아 화려한 장식을 달아두고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눈으로 거리의 풍경을 훑던 토모코의 시선이 어딘가에 멈췄다. 류세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따라갔다. 쇼 윈도우 안에는 하얀 코트와 파란 목도리, 하얀 베레모를 쓴 마네킹이 있었다.
“사고 싶어?”
류세이의 말에 고개를 돌린 토모코는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눈길은 자꾸만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류세이는 아쉬운 듯 돌아서려는 토모코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당황한 토모코는 가게 안을 둘러보고는 한 번 더 당황했다. 색색의 옷이 토모코를 맞이했다. 주로 캐쥬얼한 스타일의 옷을 파는 곳이었다. 토모코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류세이는 옷을 이것저것 들고 와서 토모코 앞에 대보았다.
“잘 어울리는데?”
“류, 류세이 선배.”
“응? 왜?”
“나가요, 우리.”
류세이는 멍하니 토모코를 바라보았다. 기가 눌린 것 같은 초조한 반응이었다. 토모코는 아까부터 직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옷을 입어보라고 권할 수도 없었다. 옷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은 류세이는 마네킹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떠올렸다. 류세이는 직원에게 목도리가 어디 있는지 물은 후, 토모코 쪽으로 가져갔다.
“옷 말고 이건 괜찮을까?”
토모코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류세이가 토모코의 목에 목도리를 조심스레 둘러주었다.
“잘 어울려. 이걸로 살래?”
“……네.”
“그럼, 이거 계산해주세요.”
류세이는 계산대에 값을 내고 그 자리에서 태그를 뗐다. 류세이가 작게 선물이라고 속삭이자, 토모코가 우물쭈물 고맙다고 말했다. 거리로 다시 나온 둘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그나저나 토모코는 검은색을 좋아하지 않아? 내 멋대로 고르긴 했는데, 그거 해도 괜찮겠어?”
“아니에요. 저, 파란색 좋아하게 됐거든요.”
꼭 메테오를 떠올리게 해서. 토모코는 덧붙였다. 류세이는 얼어붙은 채로 토모코를 바라봤다. 토모코는 수줍은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 건 직후였다. 전이라면 메테오를(웃기게도 메테오가 본인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질투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토모코가 메테오 때문에 류세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쿠타 류세이라는 사람의 진심을 알아주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들을 좋아하게 된다면 기뻤다.
“나도 검은색이 좋아졌어. 물론 토모코라면 어떤 색이라도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토모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류세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네가 좋을 대로 하는 게 제일 아닐까? 너다운 것도 결국에는 네가 정할 수 있는 거고.”
류세이는 뒷말을 흐렸다. 토모코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류세이와 사귄다는 걸 가면라이더부의 부원들을 제외하면 숨기려고 했던 것도 주위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그것까지 모를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실은 토모코가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인데, 사람들은 항상 겉모습만 따지곤 했다. 류세이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부러 옷가게에 데리고 갔던 것도 그런 오기 때문이었다. 저지르고 바로 후회했지만.
“그렇네요. 선물 고마워요.”
“아니야. 추우니까 하고 다녀야 해? 감기 걸리면 큰일이니까.”
“류세이 선배는요?”
“나? 나는 감기 잘 안 걸려.”
류세이는 슬쩍 잘난 척을 했다. 감기보다 사실 자주 다치는 게 문제였다. 이제 몸조심해야지. 원래도 조심해야 하지만, 토모코가 걱정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류세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몇 분 정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예약하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점원이 류세이의 이름을 예약 리스트에서 확인한 후, 둘을 자리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앉게 된 자리는 창가 자리로, 거리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자리였다. 서로 맞은 자리에 앉은 둘은 메뉴를 고르기로 했다. 토모코는 크림 치킨 파스타와 믹스베리 에이드를, 류세이는 오므라이스와 블루 레모네이드를 시켰다. 둘이 기다리는 동안, 점원은 식전에 먹는 빵을 먼저 내놓았다. 발사믹 소스와 올리브오일이 섞인 소스에 찍어 먹는 빵이었다.
“음, 맛있네요.”
“그렇지?”
류세이는 내심 안심했다. 물론 에피타이저가 메인 디쉬보다 맛있어선 안 됐지만, 첫인상은 괜찮다는 의미였다. 토모코가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류세이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토모코가 알겠다고 말하자, 류세이는 웃으며 돌아섰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류세이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토모코가 눈치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류세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갈 때부터 부원들이 뒤따라 들어온 것을 느꼈다.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류세이처럼 미리 예약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리도 마련한 모양이었다. 류세이는 손을 씻으면서도 억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물론 솔직하지도 못하고, 동요도 잘하고, 성격도 급하고 그렇긴 하지만……. 류세이는 생각하다가 좌절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못 미덥다. 게다가 어떤 짓까지 했는데. 다른 학교 학생이기까지 한 류세이를 아마노가와 학교 학생인 부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직접 듣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믿음직하지 못한 녀석 내지는 도둑놈 취급일 것이다.
류세이는 우울한 표정을 한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봤다. 이대로 나가면 토모코가 걱정할지도 모른다. 모르는 게 아니라, 반드시 걱정하겠지. 류세이는 손을 닦고서 표정을 고쳤다. 자리로 돌아오자, 잘 차려진 메뉴 앞에서 멀뚱히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어, 아직 안 먹었어?”
“류세이 선배 오면 같이 먹으려고요.”
토모코는 작게 웃었다. 류세이가 포크를 들자, 토모코도 그제야 포크를 들었다. 류세이는 음료수를 먼저 마시려다가 두 음료수가 칸막이로 나누어져 한 잔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빨대는 두 개였는데, 교차하는 형태로 하트 모양을 만들면서 꺾어져 각자의 음료수로 향하고 있었다. 거리 때문에 음료수를 마시려면 일어서거나 토모코 옆에 앉아야 했기에, 류세이는 머뭇거렸다. 열심히 파스타를 먹고 있던 토모코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 음, 그게…….”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묻기에는 류세이는 평소에도 토모코 옆에 잘 앉았다. 학년이 달라 수업 때문에 떨어져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붙어 다니곤 했다. 토모코는 자신이 류세이 옆에 붙어 다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류세이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있고 싶어서 있었다기보단 자연스럽게 옆에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토모코는 계속 의아한 눈빛으로 류세이를 바라봤다.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류세이는 이러다가 토모코가 자신이 토모코를 불편해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물거리던 류세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 음료수 같이 마시고 싶어서.”
“물론이죠.”
안쪽으로 들어간 토모코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소리 나게 두드렸다. 류세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토모코의 옆에 앉았다.
“맞다. 이거 드셔보실래요? 맛있어요.”
“그래도 될까?”
“응. 아- 하세요.”
아-. 류세이가 소리를 내며 입을 살짝 벌리자, 토모코가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류세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진하면서 부드러운 크림이 맛있었다. 면도 적당히 삶아져 소스와 잘 어울렸다. 그동안의 긴장이 풀릴 정도의 맛이었다. 토모코가 눈을 빛내며 류세이를 응시했다. 류세이는 웃으면서 맛있다고 말했다.
“그래요?”
“내 것도 먹어볼래?”
“네. 그 전에…….”
토모코가 티슈로 류세이의 입가를 가볍게 닦아주었다. 류세이는 허둥지둥 자신의 입가에 묻은 것이 있나 다시 확인했지만, 토모코가 이미 닦아준 듯했다. 토모코가 후후,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괜히 찔린 류세이가 내뱉었다.
“치, 칠칠치 못한 건 아니야.”
“알아요. 칠칠치 못한 건 아니지만, 긴장은 하신 거죠?”
류세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창피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든 숟가락은 잘게 떨렸다. 보다 못한 토모코가 류세이의 손을 잡고 오므라이스를 자신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토모코가 오므라이스의 맛을 음미하는 동안 류세이는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데미글라스 소스인가. 이것도 맛있네요. ……류세이 선배?”
“어, 어. 어? 어, 그래. 다행이네.”
“추우세요? 엄청나게 떨고 계신데요.”
“나,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하하.”
어벙한 미소를 지으며 류세이가 손을 내저었다. 또 바보같이 굴었다. 바로 후회했으나 엎지른 물을 담을 수는 없었다. 아니 물이야 걸레로 닦아서 짜면 된다지만, 행동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점수가 1분마다 깎이는 것 같은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으응…….”
류세이가 마른세수를 하자, 토모코가 작게 웃으며 류세이의 입에 빨대를 들이밀었다. 자기도 모르게 빨대를 입에 물고 숨을 들이켜자, 시원한 블루 레모네이드의 맛이 느껴졌다. 류세이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토모코도 자신의 에이드를 한 입 맛보더니,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길 잘한 것 같아요.”
“그래? 나도 오길 잘한 것 같아.”
류세이가 환한 얼굴로 말하자, 토모코는 잠시 따라서 웃다가 자신의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류세이는 묵묵히 입으로 음식을 넣다가 토모코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눈, 오겠네요.”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눈 안 내릴 거라고 하던데. 내리게 되면 올해 첫눈이 되는 건가.”
“그렇네요. 류세이 선배.”
“응?”
“저랑 내기하실래요? 오늘 눈이 내릴지, 아니면 안 내릴지.”
어느새 창밖의 하늘을 조용히 바라보던 토모코가 짓궂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내기, 좋지. 하지만 류세이는 무슨 내기든 자신이 토모코에게 질 거라고 생각했다. 토모코가 눈이 내린다고 말하면 100% 눈이 내릴 것이었고, 비가 내린다고 하면 비가 내릴 터였다. 따라서 내기에서 류세이가 지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지면 아무렴 어떤가. 이기는 쪽보다 지는 쪽이 더 기쁠 거라고 류세이는 생각했다.
“좋아, 내기하자. 토모코는 눈이 내린다는 쪽에 거는 거지? 그러면 나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쪽에 걸게. 내기에서 이기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어때?”
“후후, 좋아요. 소원의 내용은 오늘이 지나는 순간, 승부가 결정되면 알려주기로 해요. 헤어지기 전에 내리면…… 바로 이야기할까요?”
류세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자, 점원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선물상자 모양의 초콜릿 장식이 올라간 레드벨벳 케이크를 가져왔다. 케이크 위에는 말차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토모코는 작게 감탄했다. 포크로 한 입씩 케이크를 무너뜨려 가면서 둘은 웃었다.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고백하던 순간도 이렇게 낯간지럽고 달짝지근하고 동시에 씁쓸했던가. 류세이는 멀지도 않으면서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류세이가 스바루보시 고등학교로 돌아가기로 한 날, 류세이는 토모코에게 또 스바루보시에 놀러 오라고 인사했다. 으레 하는 인사치레로 보일지도 몰랐으나 류세이는 진심이었다. 연갈색 교복 사이에서 원색의 파란 교복 블레이저는 튈 게 분명했지만, 오히려 토모코를 잃어버릴 일은 없었다. 어두운 구름에 싸여있는 밤하늘이 아닌, 관측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성단처럼 자신의 학교도 그렇게 보이기를 류세이는 바랐다. 그래서 토모코가 밝은 얼굴로 류세이를 보러 왔을 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
“네. 겐타로 선배가 데려다주셨거든요.”
다행이네. 류세이가 대답했다. 언젠가 겐타로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류세이는 웃었다. 여름이 지나서인지 해가 지는 시각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지만, 종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문제는 아마노가와 학원 고등학교 학생의 등장에, 스바루보시 학생들의 이목이 쏠린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토모코가 눈에 들어왔다. 류세이는 토모코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고는 얼른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토모코는 눈을 빛냈고, 류세이는 뒤에서 토모코에게 다가오는 눈길을 차가운 눈빛으로 쫓아냈다.
거대한 성당 혹은 성의 도서관을 연상케 하는 도서관의 풍경에 토모코는 입을 벌렸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풍스러운 무늬의 벽과, 횃불과 샹들리에를 모사한 것 같은 전등에 토모코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빙빙 돌았다. 류세이는 만족한 얼굴로 자신이 주로 앉는 자리를 안내했다. 학생들에게 주로 인기 있는 자리는 1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2층에 있는 좌석이었다. 1층을 볼 수 있도록 2층의 면적은 1층에 비해 작게 지은 탓에(거기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중앙에 있는 사서 자리 바로 옆에 있었다.) 자리 또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시험 기간이 되면 2층은 일찍 오지 않는 이상 항상 만석이었다. 하지만 류세이는 2층보다는 채광이 잘 들어오는 1층 자리를 선호했다. 햇빛이 잘 드는 곳인 데다가, 책을 찾기가 더 수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토모코는 계속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서관의 내부 디자인은 오래된 과거에서 가져왔지만, 그래봤자 책은 고등학생들이 읽을 법한, 혹은 관심 있을 현대 도서였다. 책의 양도 그랬지만 도서관은 학교 건물 중에서도 돈을 깨나 들였을 것 같은 호화로운 건축물이었다. 명문이라는 이름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의도라면 나름 성공한 듯했다. 여하튼 류세이는 언젠가 이곳에 토모코를 꼭 데려오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토모코였을까. 당연하게 여겼던 마음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을 무렵, 류세이는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토모코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단지 도서관뿐만 아니라, 다른 장소나 물건을 접했을 때도 문득문득 토모코가 떠올랐다. 도서관을 다 둘러본 토모코가 류세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근데 제가 와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 아마노가와는 우리 학교랑 자매결연 맺은 학교잖아. 그리고 타교생은 아마노가와 학원도시 내에 있는 학교라면 학생증만 대면 괜찮다고 되어있어.”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양 토모코가 고개를 수그리고 속닥거리자, 류세이가 똑같이 고개를 수그리고 말하다가 도서부 학생이 앉아있는 자리 뒤편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기본 수칙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대출은 몇 권까지 가능하며, 반납은 언제까지. 음료수를 포함하여 먹을 것을 반입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나 다른 학교 학생이라면 열람은 가능하지만, 대출은 학생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토모코는 이해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류세이는 잠시 웃은 후 자리에 앉았다. 책장과 가깝고 거대한 유리창이 치렁거리는 햇빛을 책상에 그대로 펼치는 자리였다. 여름이라면 피했을 테지만 가을이고 해도 슬슬 지기 시작하는 시각이라 햇빛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토모코는 가장 먼저 문학 서적이 진열된 책장을 찾아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류세이는 그 옆에서 책을 고르는 척하며 토모코가 무슨 책을 고르나 관찰했다. 토모코는 생각보다 금방 책을 골라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멍하니 있던 류세이는 허겁지겁 토모코가 책을 꺼낸 근처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마찬가지로 토모코의 맞은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월야연회’, 생소한 제목의 책이었다. 언뜻 표지를 보니 판타지 소설인 모양이었다.
“어라, 류세이 선배. 선배도 판타지 소설 좋아하세요?”
“응? 아, 으응. 좋아한다기보다 시간 죽일 때 가끔 읽어.”
어디까지나 친구들의 강요 아닌 강요를 견디다 못해 조금 읽고 덮는 정도였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낱장을 넘기는 류세이에게 토모코가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작가들, 최근에 데뷔한 신인 작가거든요. 이 작가는 카게야마 린, 이 작가는 소우세이 하이드인데……. 아, 소우세이 하이드 쪽은 물론 필명이에요. 둘 다 다크 판타지 작가인데 카게야마 작가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인간의 마음이랄까, 그걸 따듯하게 잘 표현해요. 소우세이 작가는 완전 반대 성향인데 이 사람 소설도 아예 매정하지는 않아요. 읽다 보면 소소하게 희망은 있는 거 같고…….”
류세이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얼핏 들으면 입안에서 꿍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들으면 자꾸만 휘파람이 실패하여 헛되게 내뱉는 숨소리 같기도 했다. 류세이는 턱을 괴면서 토모코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평소에는 표정 변화 없이 멀뚱거리기만 하는 토모코가 눈에 힘을 줘가면서 열변을 토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서관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소리까지 높여가면서 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토모코는 이곳이 도서관이고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토모코의 그런 행동을 지켜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류세이 한 명이었다. 열심히 설명하던 토모코가 멋쩍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류세이는 토모코가 어색하지 않게 자신의 책을 보여줬다.
“그럼 이 책 작가도 알아?”
은근히 류세이의 눈치를 보던 토모코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토모코의 입에서 작가와 작품 이야기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토모코의 설명을 귀엽게만 듣던 류세이도 감탄하기 시작했다. 토모코는 판타지 작가뿐만 아니라 추리소설이나 순수문학 쪽에도 조예가 깊었다. 국어 교과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그 안에 수록된 작품을 도서관에서 찾아본다면서 토모코가 덧붙였다.
“단편소설은 그 작품 하나도 중요하지만, 소설집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그 안의 테마의 변화랄까. 차이점을 찾는 것도 재밌고요.”
“그렇구나.”
“……저.”
“응?”
“제가 너무 흥분했죠…….”
무안한 듯 우물쭈물 말하는 토모코를 보고 류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토모코는 자신의 행동이 민망했는지 그 후로는 조용히 책만 읽었다. 류세이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 토모코를 바라봤다. 책이 재미없는 건 아니었다. 내용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밤마다 특별한 사람들을 초대해 티파티를 여는 찻집 주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었다. 낮도 아니고 밤이라. 그 점은 이상했지만, 분위기를 상상해보면 로맨틱하기도 했고 멋지기도 했다. 류세이의 관심이 정작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을 작가가 안다면 언짢아할 터였지만, 상관없었다. 담쟁이 넝쿨이 군데군데 자란 창 앞에서 책을 읽는 토모코의 모습은 류세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도서관 안을 비추던 햇빛도 잠시 모습을 감췄다. 토모코는 류세이를 보지 않은 채로 작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들켰나?”
답지 않게 능청을 떨어보았지만, 토모코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건가. 그래도 괜찮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토모코와 함께 있으면 그게 어디든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토모코가 행복할 곳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류세이는 생각했다. 검지로 책상을 두드린 건 그런 생각을 한 다음 순간이었다. 토모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류세이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뻐끔거렸다.
‘토모코.’
토모코가 눈을 깜빡거렸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지척에서도 류세이는 망설였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오만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사쿠타 류세이는 언제고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설 사람이었다. 류세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해.’
설마 첫사랑에게 하는 고백이 말없이 전하는 고백이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도서관에는 학생들이 속닥거리는 소리와 의자를 끄는 소리, 책을 넘기는 소리나 발걸음같이 그곳에 있기에 미처 숨기지 못하고 튀어나온 소리만이 있었다. 토모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류세이를 바라보았다. 손바닥을 펴 달라는 의미로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주자, 토모코가 손바닥을 폈다. 류세이는 검지로 토모코의 손바닥에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리기 시작했다.
‘좋아해, 토모코.’
토모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류세이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음 문장을 썼다.
‘너랑 사귀어도 괜찮을까?’
토모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벼락이라도 맞은 얼굴을 마주하자, 류세이는 씁쓸한 얼굴로 손을 놓았다. 앞에 놓인 책의 글씨가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새어 나오는 숨을 손바닥으로 가로막은 류세이는 곧 책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토모코의 반응을 확인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지 않은 걸 보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과 똑같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책을 읽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도무지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영락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토모코를 보내줘야 하는 걸 떠올리자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다. 무모한 고백이었다. 톡톡, 그때 토모코가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류세이는 고개를 들었다. 토모코가 눈을 피하면서 손바닥을 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류세이는 멍청한 얼굴로 손바닥을 보여줬다. 토모코가 검지로 천천히 손바닥에 무어라 써 내리기 시작했다.
‘저도 좋아해요.’
간질거리는 느낌에 웃음을 간신히 참던 류세이가 물음표를 가득 띄운 얼굴로 토모코를 바라봤다. 류세이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토모코가 꼼지락거리며 글씨를 썼다.
‘우리, 사귀어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가 넘어졌고, 도서관 안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류세이 쪽으로 향했다. 류세이는 망연한 얼굴로 의자를 일으켰지만 선 채로 앉지는 못했다. 토모코는 허둥지둥 류세이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하도 급하게 손짓을 해서 버둥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류세이가 다시 의자에 앉은 건 몇 초 후의 일이었다. 류세이는 붉어진 얼굴을 책으로 가렸다. 좋아한다니. 토모코가 나를. 꿈인지 생시인지 몰래 뺨을 꼬집었는데 아팠다. 아픈데 하나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파서 좋았다. 꿈이 아니었다. 한참 후에야 책 위로 눈을 빼꼼 내미니, 토모코도 똑같이 책 위로 눈만 겨우 내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둘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작게 키득거렸다.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우연하고도 신기한 이야기였다.
“무슨 생각 하세요?”
포크를 내려놓고 토모코를 응시하는 류세이에게 토모코가 물었다. 류세이는 짧게 답을 끌다가 입을 열었다.
“고백했을 때 생각?”
“아, 그때요.”
토모코는 책 위로 고개를 내밀던 순간을 떠올렸는지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수줍게 웃었다.
“나, 고백 참 멋없게 했지?”
고백한 본인이 말하기 이상하긴 했지만 참으로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분위기도 뭣도 없었다. 차라리 같이 데이트하던 때에 고백했더라면 좀 더 근사했을지도 모른다. 류세이는 자신이 그렇게 느닷없고 생각도 하지 못한 순간에 사랑에 빠지고 그걸 깨닫고 또 고백하는 사람이란 것을 토모코를 만난 이후로 처음 알게 되었다. 그건 어쩌면 토모코가 류세이를 그만큼 놀라게 하는 사람이란 걸 의미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류세이의 질문에 토모코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난 분명히 차일 거라고 생각했어.”
“차긴요. 놀라긴 했지만 좋았어요. 고백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하긴 책 읽다가 고백하는 사람이 흔하진 않을 거야.”
“그거 말고도……. 류세이 선배가 절 좋아하는 거요.”
토모코는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렸다. 왜인지 풀이 죽은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상상도 못 했다고?”
왜? 류세이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자, 토모코는 손을 가만히 모으고는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류세이는 입을 다물었다. 토모코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보 같은 오해였다고 말했다. 토모코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그늘이 져 있었다. 도서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그늘과는 다른 빛깔의 그늘이었다. 좀 더 탁하고 어두운 그늘이었다. 류세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면서 토모코는 포기하지 않았다. 류세이가 다치면 가장 먼저 달려와서 걱정해주었고, 곁에 있어 줬다. 사랑을 주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토모코는 류세이에게 분에 넘칠 정도의 사랑을 주었고, 류세이는 늘 그만큼 돌려주지 못했다. 그래서 불안했을 것이다. 모든 게 무의미한 일이 되면 어떻게 하나. 류세이는 토모코가 사귀게 된 지금도 불안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그 불안이 어떤 종류의 불안인지 류세이는 알았다. 같은 불안을 안고 있기에 알 수 있는 감정이었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손을 잡았다.
“토모코.”
토모코는 류세이를 올려다봤다. 까만 눈동자는 불투명한 흑진주처럼 속을 알 수 없었다. 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마다 류세이는 무중력 상태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었고 뭘 해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류세이가 잡고 싶은 건 토모코의 손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건 서툴러서. 미안해.”
어차피 들켜버리고 말 거짓말을 해대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침묵으로 진심을 숨기고 만다. 숨기고 싶어서 숨긴 건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낸다는 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고 가슴이 꽉 막힐 정도로 마음이 벅차오르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건 김빠진 숨이었다. 손끝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괜찮아요. 알고 있으니까요.”
토모코가 류세이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한들, 전부 아는 것은 아닐 터였다. 부끄러웠다. 류세이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건 토모코야.”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도 말할래. 그 정도는 괜찮지?”
토모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말을 집중해서 들을 때처럼, 토모코는 진지한 낯빛으로 류세이를 바라보았다. 류세이는 손을 내렸다. 쑥스럽지만 피하지 말자. 토모코는 류세이를 기다려줬다. 이번엔 이쪽에서 한 걸음 나아갈 차례였다.
“내가 나타날 때마다 기뻐해 줘서 고마워. 그때 넌 메테오가 나인 걸 모르고 있었지만.”
매번 토모코를 구해주게 된 건 우연이었지만 그래도 토모코는 기뻐해 주었다. 처음에는 류세이의 행동을 못마땅해했지만, 점점 자신을 믿어주었다. 그 믿음 앞에서 류세이는 모른 척 등을 돌렸다. 내심 기뻤고, 동시에 괴로웠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만 행동하던 류세이가, 그러니까 메테오가 이기면 진심으로 기뻐하고 다치면 진심으로 괴로워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돼서도 좋아해 줘서 고마워.”
“류세이 선배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미 나는 한 번 너를 배신했잖아.”
토모코는 침묵했다. 마음의 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사라지게 해서도 안 됐다. 류세이는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아무것도 없는 의자 한구석을 바라봤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거기 앉았겠지. 누군가가 또 앉겠지. 류세이는 갑작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도 흔들리는 자신과 달리 토모코는 훨씬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하고많은 이유 중에서 고르자면, 그런 이유일지도 몰랐다. 짧고 강렬하게 빛나며 타오르는 류세이와 달리, 토모코는 밝게 빛나는 별들 사이에서 그리 밝지 않은 빛을 은은하게 퍼뜨리고 있었다. 어쩌다 많디많은 별 중에서 그 별만이 유독 눈에 들어왔을까. 보고도 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을까. 모든 일이 대개 그렇듯, 그 역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류세이 선배.”
“네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쭉 생각했어. 네 옆에 있는 건 나이길 바랐어.”
류세이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토모코는 조용히 류세이의 말을 들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더는 배신하지 않을게. 네 믿음을. 물론 나도 널 믿고 있어. 많이 좋아하니까.”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토모코가 고개를 듣고 환하게 웃었다. 그늘이 있던 자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미소였다. 누군가는 그 미소마저도 불길하고 어둡다고 생각하겠지만, 류세이의 눈에는 그보다 더 사랑스러운 미소는 없었다. 그러나 토모코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무언가 잘못 말했나 싶어서 토모코의 손을 잡으려는데, 토모코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기. 부원들, 저희 뒤에 있는 거 같아요.”
류세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토모코와 즐겁게 대화하는 사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말로는 절대 지지 않겠다고 호기를 부렸지만, 솔직히 누가 아는 사람들 있는 데서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좀 지나면 될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류세이는 충격으로 비틀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 어디 가시게요?”
“토모코. 잠시만 기다려.”
“자, 잠깐만요!”
류세이의 다음 행동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토모코가 급하게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류세이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바로 뒤쪽 테이블 앞에 섰다. 단체석에는 사람이 8명이 4명씩 나누어 앉아있었고, 하나같이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류세이가 팔짱을 끼고 버티고 있자, 토모코가 류세이의 옆에 섰다. 류세이는 그중 바깥쪽에 앉아있던 한 명의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눌러 내렸다. 류세이와 눈이 마주친 곱슬머리의 소년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마노가와 학원 고등학교 1학년, 가면라이더부의 신입 부원 중 한 명인 쿠사오 하루였다. 하루는 류세이를 보자마자 눈도 마주치지 않고 급하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류, 류세이 선, 흑! 선배……. 저,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 흑! 아니고요…….”
하루는 거의 울상이 되어 굳은 얼굴을 한 류세이에게 변명했다. 류세이는 바로 하루 옆에서 메뉴판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질문했다.
“란, 너는 할 말 없어?”
란이라고 불린 소녀가 메뉴판을 내리며 피곤하다는 듯 류세이를 바라봤다. 란은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하루에게 물을 내밀면서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린 나머지 여섯을 봤다.
“어, 그게요. 제가 좀 말하기가 곤란한 처지라서.”
“그건 네가 벌인 건 아니라는 거네.”
“네. 그렇죠.”
“그렇다는데요, 회장, 부장.”
둘을 부르자 하루와 란의 맞은 편 창가 끝자리와 그 옆의 옆자리에 있던 미우와 유우키가 메뉴판을 내렸다. 류세이가 평소엔 이름으로 부르다가 갑자기 부장이라고 불러서인지 유우키의 눈동자가 매우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류세이는 천천히 테이블을 한 손으로 짚고 한 손은 허리를 짚었다. 류세이의 옆에선 토모코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유우키. 아까 내가 듣기로는 말이야. 토모코랑 내가 데이트한다는 사실은 네가 들은 거 같은데.”
“그, 그건 맞아…….”
“데이트 코스는 어떻게 알았어? 여기, 예약 안 하면 요즘은 자리 잡기 힘들 텐데. 게다가 단체잖아?”
“나, 나, 나는 몰라……. 하야부사 군을 걸고 맹세할게!”
유우키가 옆에 있던 하야부사 인형을 내밀었다. 하야부사 군은 부등호가 두 개는 들어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류세이는 의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네가 하야부사 군을 걸 정도면 거짓말은 아니란 거고. 이 많은 인원을 다 데리고 올 정도의 사람이라면, 여기를 예약한 건 역시 회장이겠죠.”
그 말에 미우의 눈동자가 떨렸다. 웬만해서는 동요하지 않은 미우였지만,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류세이는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 류세이의 시선이 이번에는 미우와 유우키 사이에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메뉴판을 잡은 손이 덜덜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제이크?”
“넵?!”
제이크는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너지? 우리가 여기 오는 거 알아낸 거. 어떻게 알았어?”
“그건…… 영업 비밀이라서요. 하하하.”
류세이가 그 말에 오히려 크게 웃자 제이크의 눈동자도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댄서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저, 저, 저 그게요. 제가요. 이게 그, 뭐냐, 진짜로 이건 못 알려드리거든요!”
하루와 마찬가지로 제이크도 울상이 되었다. 류세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제이크는 파리한 얼굴로 손을 교차해 엑스를 만들었다.
“진짜예요! 정보를 알려준 건 맞는데 오자고 한 건 제가 아니라 선배들이거든요! 그나저나 류세이 선배 은근히 로맨틱……. 으악!”
양쪽에 있던 미우와 유우키가 제이크의 등을 손으로 때렸다. 겐타로와 켄고, 슌이 그제야 메뉴판을 내려놓고 류세이의 눈치를 봤다.
“안녕, 겐타로. 안색이 좋아 보이네.”
“어, 으응. 류세이, 잘 지냈어?”
잘 지낸 것처럼 보이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류세이의 침묵에 겐타로는 시선을 피했다. 류세이는 한숨을 쉬었다. 아까부터 토모코가 류세이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그만하자는 눈짓을 했다. 안 그래도 크게 화를 낼 생각도 없었고, 대충 부원들이 걱정하는 게 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켄고까지 쫓아 왔을까. (물론 표정을 보건대 절대 자기 의지로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들 걱정하는 건 뭔지 알아. 그런데 이렇게 쫓아올 정도는 아니야.”
“류, 류세이.”
“아까 말한 거, 너희도 어쩌다가 들었겠지만 진심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점심 잘 먹고. 먼저 가 본다.”
얼떨떨한 표정을 한 부원들을 두고서 류세이는 토모코를 데리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계산하는 동안 토모코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언짢았던 것은 아닌지 걱정되던 찰나, 토모코가 바깥에 나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화난 거 아니죠?”
“응? 화? 내가?”
“네. 아까 좀…….”
“쫓아온 게 불쾌한 건 맞는데……. 뭐, 내가 겁줬으니까 반성은 하겠지?”
류세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토모코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었고, 게다가 미행한 게 잘못이란 건 본인들이 더 잘 아는 눈치였다. 알아듣게 이야기했으니 더 쫓아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류세이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짧게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를 가야 좋을까. 류세이를 보던 토모코가 갑자기 류세이의 볼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아.”
“아파요?”
“아, 아니? 아픈 게 아니고……. 왜 그래?”
“……그러고 보니 갈 데가 있는데. 따라오실래요?”
원래 우리 데이트하던 거 아니었니. 따라올 거냐고 묻지 않아도 따라갈 거였는데 말이야. 류세이는 구태여 말하지 않고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토모코는 새초롬하게 돌아서더니 앞장섰다. 아, 너무 귀엽다. 류세이는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주책이라면 주책이었지만 저 당당하고 도도한 태도는 사랑스러운 게 사실 아닌가. 류세이는 자기도 모르게 실실거리면서 토모코의 뒤를 따라갔다.
둘은 광장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에 들어섰다. 사람이 없어서인지 광장만큼의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크리스마스 장식이 있긴 했으나 광장 거리의 가게들처럼 캐럴을 크게 틀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게에서 은은하게 클래식이나 오르골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골동품 가게가 많은 것 같았다. 골목과 골목 사이를 요리조리 오가던 토모코가 멈춰 섰다.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풍기는 음침한 기운에 류세이가 자기도 모르게 떨었다.
“여기예요.”
“그, 토모코. 여기 어디야……?”
“카페예요.”
여기가? 류세이가 되물었다. 아무리 보아도 흔히 생각하는 카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창은 있었으나 안쪽에서 커튼으로 가려 안을 들여다보기가 힘들었고, 여느 카페와 다름없는 검은 칠판을 붙여놓은 입간판에는 메뉴 설명도 없이 달랑 영업시간만이 적혀 있었다. 제대로 된 간판 하나 없었다. 별다른 홍보 없이 입소문만으로 인기가 생긴 카페나 식당이야 흔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곳에도 사람이 오나. 류세이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토모코가 설명했다.
“여기, 헌책도 팔고 골동품도 조그맣게 팔아요. 특히 여기에서 파는 오르골이나 LP판이 희귀한 게 많아서 인기가 많아요. 드물지만 오컬트 물품도 파는 모양이고.”
그래서 단골손님이 좀 있는 편이에요. 토모코가 덧붙였다. 류세이는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모코는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커피 향이 진동했다. 류세이는 홀리듯 토모코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없는 건 아니란 토모코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남은 테이블은 별로 없었다. 채광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대신 은은하고 따듯한 조명(역시 오래된 전구였다.)이 카페를 비추고 있었다. 문가와 창 근처에는 나무로 된 의자와 테이블이, 카운터 앞에 바 형식의 테이블과 의자가 몇 개 있었고, 구석에는 책꽂이와 골동품을 진열해두는 공간이 있었다. 류세이는 신기하다는 듯 카페를 둘러보다가 토모코가 앉은 자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 사장님. 얼그레이 밀크티 따듯한 거 하나 주시고요. 류세이 선배는 뭐 마시고 싶으세요?”
“나? 나도 같은 거로.”
“두 잔 주세요.”
카운터와 가까워서인지 사장이라 불린 남자가 토모코의 주문을 알아듣고 바로 차를 타러 갔다. 토모코가 고개를 들이대더니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였다.
“여기 차, 맛있어요. 찻잎도 좋은 거 쓴다고 그랬거든요.”
“그래? 토모코는 여기 어떻게 알게 됐어?”
“리츠코 선배가 알려주셨어요. 대학생들한테 인기가 많대요. 어른들도 좋아하고.”
아, 그런가. 류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카페 안에는 류세이나 토모코 같은 고등학생보다는 대학생이나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빈티지 취향이란 건가. 류세이는 생각했다. 취향에는 없었으나 분위기는 괜찮았다.
“토모코는 이런 곳을 좋아해?”
“네. 저 사람 많은 곳보다는 이런 곳을 좋아해요. 사람이 많아도 시끄러운 곳보다는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그건 류세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래빗 해치가 파괴되기 전에 토모코는 조정실 바로 옆에 있는 자리에 주로 있곤 했다. 중간 구조물이 벽처럼 돌출되어 있어서 입구에서 보면 절반 정도는 가려지는 자리였다. 토모코는 거기에 자신의 책상과 의자, 그리고 물건들을 놓고는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용했다. 켄고도 익숙해졌는지 별말은 없었다. 회장인 미우가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버린 탓에, 그 후에는 다들 자기 물건을 거리낌 없이 가져오고는 했다. 조디아츠가 나타나지 않을 때도 래빗 해치는 가면라이더부의 아지트라면 아지트였다. 물론 학교 내에 정식적으로 부실이 생긴 지금도 자기만의 공간은 있었지만, 그때 같은 느낌은 나지 않았다.
“앞으로는 이런 곳을 좀 더 많이 눈여겨보게 되겠네.”
“……왜요?”
토모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류세이는 당연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왜긴. 토모코랑 가고 싶어서지.”
“……아.”
쑥스러운지 토모코가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귀엽다. 너무 귀여워.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데 토모코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자꾸 그런 눈빛으로 보시네요.”
“응? 그런 눈빛이라니 무슨?”
“길 가다가 귀여운 고양이라도 마주친 눈빛이잖아요.”
“아니……. 귀엽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그게 그거죠, 뭐. 토모코는 삐죽거리다가 카운터로 가서 밀크티를 계산하고는 자리로 가지고 왔다. 토라진 것도 귀엽네……. 류세이는 생각하면서 턱을 괴고는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꽤 강한 꽃 향과 함께 부드러운 우유의 맛이 느껴졌다.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향이었다. 거기에 은은한 설탕의 맛도 감돌고 있었다. 따듯해서 그런지 향이 더 진하게 나고 있었다. 토모코도 밀크티의 맛과 향에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류세이는 토모코와 한 번 더 눈을 마주쳤다. 토모코는 시선을 피했다.
“그, 사장님. 저번에 말씀드린 거, 있나요?”
“응. 보여줄까?”
토모코와 류세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장은 카운터에서 나와 골동품이 진열된 진열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류세이에게 건넸다. 토모코가 이야기한 건데 토모코에게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류세이가 의아하게 사장을 쳐다보자, 사장은 눈짓으로 토모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엥?”
“류세이 선배 주는…… 선물이란 뜻이에요.”
류세이는 손안에 있는 팔찌를 바라봤다. 실을 꼬아 만든 팔찌의 중앙에는 나무 조각이 장식처럼 달려있었다. 나무에는 이상한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 안에는 칙칙한 색의 염료가 발라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주술적인 의미가 들어간 물건 같았다. 류세이는 팔찌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어두운 푸른색의 염료는 빛을 받을 때마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부적용 팔찌예요. 이걸 가지고 있으면 액운을 막아준대요. 골동품이 많긴 하지만 이건 사장님한테 특별 주문한 거라……. 효과는 좋을 거예요. 사장님이 이런 거 잘 만드시거든요.”
토모코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류세이는 토모코를 바라봤다. 침울한 것 같으면서도 아닌 얼굴이었다. 류세이는 토모코가 이것을 자신에게 선물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조디아츠와 싸우면서 다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선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부상도 있었다. 토모코는 항상 곁에서 그걸 지켜보았다. 류세이는 침묵했다. 앞으로는 다치지 않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류세이도, 토모코도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고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류세이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굳게 다물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위험이 자신에게 닥쳐올지, 앞으로 싸워가야 할 적이 얼마나 강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둠이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길을 가기로 한 것은 류세이였기에 피할 수도 없었다. 류세이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토모코, 나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류세이는 고개를 들었다. 토모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어딘가 결연해 보였다.
“인터폴이 되기로 한 결정,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졸업하면 나는 바로 떠나야 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일본을 떠나라는 것이 인터폴 측의 요구였다. 연수 겸 적응 기간에 얼마든지 지원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잉가가 손을 써둔 덕이었다. 먼저 고백해놓고 대체 이게 무슨 비겁한 꼴이람. 류세이는 자조했다. 토모코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류세이를 바라봤다.
“그게 류세이 선배의 꿈인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류세이 선배는 류세이 선배의 꿈을 위해서 노력하고, 전 제 꿈을 위해서 노력하면 돼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괜찮고요. ……설마 아예 안 돌아올 생각은 아닌 거죠?”
“그, 그건 절대 아니야!”
“그럼 됐어요. 안 돌아온다고 했으면 바로 도망가려고 했거든요.”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류세이가 진저리를 쳤다. 토모코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마저도 류세이가 망설이지 않기를 바라는 토모코의 배려일지도 몰랐다. 류세이는 팔찌를 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팔찌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토모코의 마음이 담겨 있어서일까. 류세이는 팔찌를 낀 자신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토모코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말은 없었지만, 입가에 남아있는 미소는 류세이를 안심하게 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던 한기는 이젠 느낄 수 없었고 손은 따듯해졌다. 그 순간만큼은 류세이는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카페에서 나와 거리를 다시 걸으며 둘은 가게들을 구경했다. 대부분은 사지 않고 나왔고, 정류장 앞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오후 4시가 되어있었다. 늦은 시각은 아니었지만 토모코의 얼굴엔 피곤이 짙게 깔려있었다. 피곤한 건 류세이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4시간 남짓밖에 못 잔 탓에 평소보다 몸이 둔했다. 돌아갈 때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설마하니 돌아가는 길에 조디아츠가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다 잘 풀린 데이트의 막장에 초를 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절대로 용서 못 한다. 류세이는 음울한 생각을 숨기면서 정류장 앞에 멈춰 선 버스에 올라탔다.
류세이와 토모코는 뒤쪽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토모코가 창가 안쪽 자리에, 류세이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승객은 몇 명 없었다. 조금 더 일찍 왔거나 늦게 탔다면 사람이 더 많았을지도 몰랐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류세이는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다. 토모코 말대로 눈이 내리려나. 류세이가 팔짱을 끼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문득 옆에서 졸고 있는 토모코가 보였다. 잘 못 잤다더니 졸린 모양이었다. 토모코는 고개를 아슬아슬하게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왼쪽으로 고개가 기운 채로 멈췄다. 무슨 꿈을 꾸는지 헤실거리고 있었다. 류세이가 토모코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봤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정말로 자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많이는 못 가져…….”
꿈속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는 걸까. 류세이는 귀엽다는 듯 웃다가 토모코의 고개가 류세이의 어깨에 기대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버스는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류세이는 토모코가 넘어질까 싶어 안절부절못하며 토모코의 고개를 손으로 잡아주었다. 다행히 토모코는 넘어지지도, 깨지도 않았다. 류세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곤히 잠든 토모코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토모코를 처음 봤을 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나고 있었다. 토모코와 함께 거리를 걷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같이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전부.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지만 당연하게 이루어낸 것은 아니었다. 둘은 과거를 딛고 일어났고, 그래서 서로에게 손을 뻗을 용기가 생겼다. 만약 내가 이룰 운명이 그런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류세이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토모코와 만나지 않은 운명 같은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 눈이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누군가 창밖을 보며 작게 외쳤다. 류세이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서 싸락눈이 내리더니 이내 굵은 눈발이 되었다.
“눈 내리네요?”
어깨가 가벼워지더니 토모코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류세이가 피곤하면 더 자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토모코는 고개를 저었다. 토모코는 눈이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더니 살짝 웃었다.
“내기, 제가 이겼네요.”
“응. 아쉽네. 이길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거짓말.”
류세이가 멋쩍게 웃자 토모코가 중얼거렸다. 토모코의 말대로였다. 처음부터 이기리라고 생각하고서 수락한 내기는 아니었다. 토모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토모코의 소원은 뭘까. 내기에 이겼으니 토모코는 류세이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옆얼굴을 흘끗 바라봤다. 토모코가 입을 열었다.
“소원은 이따가 알려드릴게요.”
“내가 그거 물어보려는 거 어떻게 알았어……?”
“류세이 선배는 얼굴에서 다 티가 나요.”
“네가 감이 좋은 건 아니고?”
“그런 것도 있지만, 아마 아닐걸요?”
토모코가 류세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류세이는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회피했다. 토모코가 류세이를 놀리는 사이, 버스가 멈췄고 두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은 거리에 쌓이기 시작해 온 풍경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둘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손을 잡았다. 류세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크리스마스에도 눈이 내릴까. 내리면 좋을 텐데. 검은 옷을 입은 토모코와 대비되는 하얀 눈은 온 세상의 색이 두 개라고 착각하게끔 했다.
골목에는 첫눈을 즐기는 아이나 어른, 개가 보였다. 눈은 매년 내리는 것인데도 왜 사람을 들뜨게 하는 걸까. 처음이라는 이유에서일 거라고 류세이는 문득 생각했다. 첫사랑이나 첫 만남이 그렇듯이. 류세이는 토모코를 바라봤다. 토모코는 류세이에게 많은 처음을 안겨줬다. 물론 처음이란 것이 주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 상대가 토모코라는 사실이 류세이에겐 가장 중요했다.
토모코, 하고 부르려던 류세이는 토모코를 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토모코는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는 눈을 향해 손을 뻗은 토모코는 손바닥에 눈을 받아냈다. 눈은 손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류세이는 그 광경을 넋이 나간 채로 지켜보았다. 추위에 토모코의 뺨은 붉게 변해있었다. 한참 토모코를 바라보던 류세이는 토모코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저, 토모코.”
“네?”
“소원, 말 안 해줄 거야?”
“그렇게 제 소원을 들어주고 싶으세요?”
어쩐지 재촉하는 것 같이 말해버려 류세이는 민망해졌다. 류세이는 자그맣게 그렇다고 중얼거렸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토모코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원이라……. 사실 딱히 없는데요.”
“딱히?”
“류세이 선배랑 사귀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덤덤한 말투에 오히려 류세이가 쑥스러운 얼굴로 허둥지둥거렸다. 괜히 다른 곳을 보며 어색하게 웃던 류세이가 웃음을 그쳤다.
“나도 뭐……. 내가 이겼어도 소원 같은 건 따로 없었을 거야. 너랑 사귀는 게 나도 소원이었으니까…….”
“그래도 류세이 선배랑 같이 ‘별 보러 가고 싶다’는 바람은 있어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같이 가자. 언제든 말만 해.”
류세이가 의욕이 넘치는 투로 말하자 토모코는 음침하게 웃었다.
“만약 제가 졌으면 저한테 들어달라고 하고 싶었던 거, 아예 없었던 건 아니죠?”
“응. ……만약에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너랑 같이 첫눈이 내리는 거 보자고 할 참이었어.”
“……네?”
“그런데 눈이 내리는 거 봤으니까 됐어.”
류세이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숨을 내뱉자 허공에 하얗게 입김이 흩어졌다.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토모코의 집은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덧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눈구름은 햇빛에 붉게 물들었다. 노을이 보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눈이 내리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집 앞에 다다르자 둘은 멈춰 섰다. 토모코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류세이는 웃으며 다음에 또 보자고 말했다. 그래도 토모코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너만 괜찮으면 언제든 만나자고 해도 되니까.”
“……진짜요?”
“응. 밤중이어도 괜찮아. 약속한 대로 별 보러 가도 괜찮고.”
“이왕이면 유성우가 내리는 밤이었으면 좋겠네요.”
“아……. 응. 나도.”
류세이는 조심스레 웃었다. 토모코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고는 했다. 익숙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류세이는 토모코의 이런 면 또한 좋아했다. 류세이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토모코와 별을 볼 날을 기대하느라 다시 잠을 설칠 것을 생각하니 들떠서 추위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돌아서는 토모코의 뒷모습을 보면서 류세이는 정작 자기가 더 아쉬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을 흔드는 류세이의 표정이 조금 굳어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토모코가 돌연 돌아설 때까지 류세이는 손을 계속 기계적으로 흔들었다. 토모코가 돌아보자, 류세이는 멈칫했다. 토모코가 종종걸음으로 류세이에게 다가왔다. 토모코는 류세이의 바로 앞에 서더니 류세이를 빤히 올려다봤다.
“응? 왜 그래?”
뭘 잘못했나. 설마 끝에 와서? 잊어버렸던 악몽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류세이는 불안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을 돌렸다. 하얗고 하얀 눈만이 들어왔다. 하지만 눈을 보면 도리어 새까만 토모코의 눈동자가 떠올라서 다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토모코를 제외한 세상은 하얗기만 했다. 도대체 하얗지 않은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뿌옇고 동시에 하얬다. 눈을 돌릴 수 없었다. 토모코를 바라봤지만, 토모코는 계속해서 류세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토모코에게 뭔가 잘못되었느냐고 용기 내어 물어보려던 찰나, 류세이의 입술과 토모코의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떨어졌다. 망연한 얼굴을 한 류세이에게 토모코가 말했다.
“오늘 즐거웠단 의미의 인사예요.”
류세이가 뒤늦게 놀라자, 토모코는 말없이 꾸벅 인사하고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류세이는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좋아해. 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붉어진 낯을 손바닥으로 가려 애써 숨긴 류세이가 중얼거렸다. 하염없이 문 앞에 서서 떠나지 못하면서도 류세이의 마음은 이미 토모코와 별을 바라보는 미래로 달음박질했다. 겨우 열을 식힌 류세이가 돌아서는 동안, 눈은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겨울날의 저녁이 검푸른 옷을 두르고서 노을이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