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팡패트 엔딩 이후 시점입니다. 동인설정과 스포일러 있습니다.
“뭐 보고 계세요?”
쪼그려 앉아 바닥만 들여다보던 사쿠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미카와 시선이 마주친 아주 짧은 순간, 수줍음이 스쳐 지나간 얼굴을 행복이 가득 채웠다. 사람이 아주 많이 오가는 번화가, 빌딩과 빌딩 사이 아주 좁은 공간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국제경찰, 꽤 불길한 조합이었지만 헤실거리는 표정을 보니 기묘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우미카쨩! 여긴 어쩐 일이야?”
“뭣 좀 사러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이예요. 사쿠야 씨는요?”
“여기 꽃이 피어 있더라고! 신기해서 보고 있었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사소한 이유다. 우미카는 사쿠야의 시선을 따라 바닥을 훑었다. 건물 모퉁이, 콘크리트의 균열 사이에 반쯤 봉오리가 벌어진 민들레가 들어앉아 있었다. 초여름 늦은 오후 햇살 속에서 노란색이 도드라지게 빛났다.
“용케 이런 곳에 뿌리를 내렸네요.”
“흙도 뭣도 없는데. 어떻게 이런 곳에서도 자라는 건지 신기하단 말이지~”
“그러게 말예요. 아, 외근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양복이라니 좀 오랜만이네요.”
“아니, 어제 야근했거든. 오늘은 오전 근무! 근데 보고서 완성이 늦어져서 이제 겨우 퇴근해―으아아아악!”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출퇴근용 가방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민들레를 겨우 빗나간 가방을 부산하게 수습하며 사쿠야가 민들레에게 미안미안, 하고 연신 사과를 건넸다.
“이렇게 두려니까 되게 불안하네. 옮겨심지는 못하겠지?”
“옮기려면 건물을 통째로 들어내야겠네요.”
“그런가아. 어쩔 수 없네. 오늘은 그냥 가야겠다. 밟히지는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지나가다가 밟기는 힘들 거예요.”
미련이 남은 듯 몇 번이나 기웃거리며 꽃을 살피던 사쿠야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앗, 우미카쨩 나 기다린 거야? 미안.”
사쿠야의 말끝으로 기다란 하품이 흘러나왔다. 우미카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시 머리가 굳었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이 상황에서 하품이라니! 사쿠야도 새빨개진 얼굴로 어설프게 따라 웃다가, 다시 한번 하품을 하고는 아주 고개를 숙여 버렸다. 눈이 좀 흐린 것도 같다. 이런 상태에서 땡볕에 쪼그려 앉기까지 했으니, 제아무리 체력이 뛰어난 경찰이라도 슬슬 한계일 것이다.
“미안, 세 시간밖에 못 잤어….”
“괜찮으세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아직은 괜찮아. 집에 가서 밥 먹고 바로 자면 열두 시간은 잘 수 있으니까, 하암.”
“얼른 들어가세요. 내일 봉사활동 있는 날이잖아요?”
느리게 끔벅이던 사쿠야의 눈이, 번쩍 커졌다.
“아, 아―아? 아, 내일이구나! 맞다!”
허둥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한 사쿠야가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역시나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엘리트 경찰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어설픈 모습이 즐거운 동시에 조금 심술이 들었다. 나는 알람 다 맞춰 놓고 엄청엄청 기다리고 있었는데.
쾌도들이 돌아온 후 국제경찰과 일본 경찰에서는 그들의 처우에 대해 아주 많은 고민을 했다. 컬렉션을 마음대로 취득한 것은, 루팡가에서(대단히 유능한 변호사단과 함께) ‘원래 우리 가문의 물건을 우리가 고용한 사람들이 회수한 것’이라 주장해 무죄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본인들의 처지나, 본의 아니게 갱글러 소탕 및 실종자의 귀환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도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온갖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공무집행방해죄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벌금과 봉사활동 정도로 끝난 것도 국제경찰 전력부대 쪽에서 필사적으로 도와준 덕분이라 들었다. 봉사활동은 총 1200시간, 한 주일에 두 번, 국가의 지원을 받는 보육원에서 진행된다. 토오마는 특식을 만들거나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요리 수업을 하고, 카이리와 우미카는 선생님을 보조하거나 청소 같은 잡일을 돕는다. 감독은 일본 경찰에서 맡고 있지만,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국제경찰 쪽에서도 참관하러 온다. 그게 내일이다.
“완전 잊어먹고 있었네. 선배한테 혼날 뻔했어. 알려줘서 고마워.”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사쿠야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시무룩했다 싶은 표정은, 우미카와 눈을 마주치자 금방 벙긋 웃으며 활기를 되찾았다.
“우미카쨩도 집에 가는 거야?”
“네. 볼일도 끝났고, 슬슬 저녁이니까요. 엄마가 오늘은 맛있는 거 할 테니 빨리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우와, 좋겠다~ 난 편의점 도시락 확정인데. 아, 그러면 데려다줘도 될까? 우미카쨩 편한 곳까지.”
“그러면, 역 앞까지 함께 가실래요? 어차피 사쿠야 씨도 거기까진 가셔야 하죠?”
“응!”
허공에 주먹질을 할 정도로 흥이 오른 사쿠야가 금방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말야, 츠카사 선배가 보고 있던 인형이 케이치로 선배랑 닮았다고 했다가 등짝을 얻어맞았어. 진짜 아프더라. 노엘 씨가 역 근처에 새로 생긴 꼬치집 전단지를 얻어오신 모양인데 글쎄 한 번도 꼬치를 먹어 본 적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금요일에 회식하러 가기로 했어.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단둘이 함께 걷는 길은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았다. 서로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려서, 더 숨길 것이 없어서 그런가. 예전에는 항상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재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니까.
어느새 사람이 더욱 많아지고 소음이 늘어났다. 퇴근 시간에 가까워진 역 앞은 한층 붐볐다.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는 사람에 막히고 부딪히면서도 사쿠야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빛을 더해 가는 미소가 신경 쓰였다. 글쎄,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마주할 때마다 항상 웃고 있으니까 오히려 궁금하잖아.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웃는지. 무엇 때문에 행복한지.
“뭐 즐거운 일 있으세요?”
“에엥?”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표정이 홱 변한다. 오만 상을 찡그리며 고민하던 사쿠야가 금세 벙긋 웃었다. 이렇게 홱홱 얼굴이 변하는 거, 정말 신기하다니까.
“그런가아? 아하하, 그렇네. 야근하긴 했지만 일찍 퇴근도 하고, 예쁜 꽃도 봤고, 우미카쨩이랑 만났잖아. 사람 진짜 많은데 우미카쨩이랑 딱! 하고 만난 거 진짜 짱이지 않아?”
사쿠야 씨다운 대답이네요.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자신이 사소한 것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기에, 타인의 행복도 있는 힘껏 지키려 하는 사람이니까. 가끔 정도를 모를 때도 있지만.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던 사쿠야가, 말을 덧붙였다.
“음, 그리고 내일도 우미카쨩을 다시 만날 수 있고. 사실 그게, 제일 좋아. 아하하하.”
그런가요. 저도 내일 봉사활동 기대되네요. 대충 대꾸하면 될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다시 만날 수 있다, 단순한 말인데 너무나 무겁다.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겨우 돌려받은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결국은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들. 시호와 아야와 쇼리는 다시 1년을 바쳤고 노엘은 아직도 이루지 못한 소원을 붙들기 위해 컬렉션을 뒤쫓고 있다. 자신을 움직이는 시간은, 작은 즐거움은, 돌아온 사람들의 시간과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생명과 남겨진 사람들의 삶 위에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목에 걸려버린 질문을 삼켜버리고, 우미카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찾았다.
“잠시만요.”
“으응? 응.”
불쑥 내민 봉투를 어영부영 받아들고 나서야 사쿠야가 멍하게 이게 뭐야, 하고 물었다.
“이거 샘플로 받은 차 티백인데요, 숙면에 좋대요. 라벤더 베이스라서…아, 민들레도 들어가 있네요. 노란 민들레랑 흰색 민들레인데 노란 건 간에 좋고 흰색은 눈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주워들은 말을 어떻게든 기억하려 애쓰다 보니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다. 말도 목 아래 깊은 곳으로 흘러내려 갔다.
여러분은 지난 1년간, 어떻게 보내셨나요?
알아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가 된 거. 어떤 마음으로 1년간 싸워 오셨던 건가요. 무엇으로 버티셨던 건가요. 우리가 없어서, 아냐, 물어보면 안 돼. 무슨 염치로 우리가 없어서 괴로웠냐고 물어볼 수가 있겠어. 일 년 가까이 속여왔고, 그런데도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되돌아와서 기뻐해 주었고, 조건 없이 우리를 아껴 주는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히.
“고마워!”
어설픈 듯 세상을 다 가진 듯 벙긋 웃는 얼굴로 사쿠야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곧바로 냄새를 킁킁 맡으며 아, 향기 좋다, 라고 히죽거리는 것으로 보아 틀린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잘못된 선택인 것 같단 말이지.
“우미카쨩한테는 항상 뭘 받기만 하네.”
“혹시 뭐 법에 걸리는 건 아니죠? 일단 저도 공짜로 받은 거긴 한데.”
“에에~ 그런가? 그럼 안 되는데…. 짐한테 물어볼까아….”
“그럼 내일 알려 주세요. 안 된다고 하면 내일 돌려주시면 되잖아요?”
“그렇네! 우미카쨩은 역시 똑똑해!”
정신 사나울 정도로 홱홱 바뀌는 표정에 어쩐지 안도감마저 들었다. 사람이 변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1년간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면서도 거의 변하지 않은 사람의 존재가, 자신을 이 시간에 붙들어 매어 준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된다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없이 말해 준다. 우미카는 하고 싶은 말을 다시 삼켰다.
고마워요.
세상에는 셀 수도 없는 잡초들이 자라요. 모든 잡초를 다 돌봐줄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돼요. 하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그런 사소한 것을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런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우리가 돌아올 세상을 위해 힘들고 괴로워도 버텨주었다는 거.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돌려드릴 수 있을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내일 뵐게요.”
“응! 내일 또 만나!”
사쿠야가 손을 번쩍 흔들었다. 쥐고 있던 차 봉투가 날아갈 정도로. 작은 봉지는 엄마 손을 잡고 가던 꼬마의 머리를 지나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바닥에 착지했다. 눈을 둥그렇게 뜬 사쿠야가 허우적거리며 작은 봉지를 쫓아가는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사쿠야 씨는 변한 게 없다니까. 그래,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고마워요.
웃을 수 있는 오늘을 지켜 줘서.
다시 만날 수 있는 내일을 지켜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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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에 영감을 준 노래는 <ヒーローは決して泣かない>입니다. 요코야마 료 노래 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