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간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라이더부 활동을 하면서 언제 조디아츠가 활동할까 걱정하던 날도 이제 적어질 거라고 생각하니 토모코는 안심이 되면서도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켄고는 물론 사라진 것이 ‘호로스콥스’지 ‘조디아츠 스위치’는 아닐 거라고 했기 때문에 활동은 계속될 터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켄고 선배도 돌아왔고, 학교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토모코는 배게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마노가와도 원래 모습을 유지하며 변해가고 있었다.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지만,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학교. 모두가 이루어나갈 모습이었다. 변해나갈 학교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언제나 그 생각을 할 때면 불현듯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류세이 선배는, 잘 지내고 있을까.’
방학이 끝나고 류세이는 스바루보시로 돌아갔다. 지금쯤이면 원래 다니던 학교에 다시금 적응하고 있을 것이다. 토모코는 이불을 끌어안았다. 모든 게 꿈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잠들고 있는 이 순간에는 특히 그랬다. 류세이는 아마노가와에서 일어났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가면라이더 메테오로 활동하는 것은 미래에도 마찬가지겠지만, 토모코는 되도록 류세이가 교환학생으로 지내온 기간을 좋게 기억했으면 했다.
그리고 토모코는 류세이의 추억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으면 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토모코는 가슴이 아팠다. 부정할 수도 없이, 류세이는 토모코의 심장에 안착해버렸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걸까 생각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이유도 점점 불투명해졌다. '아마도'라는 단어가 붙는 문장이 많아졌다. 류세이의 의지와 상관없는 상상이 많아졌다.
'또 스바루보시에 놀러와.'
류세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토모코는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 찾아가야 기뻐할까. 아무리 성장했다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특히 사람의 마음이 그랬다. 남들보다 눈썰미가 날카롭기는 했지만 반면에 무딘 부분도 있었다. 토모코는 잠이 깨 핸드폰을 꺼냈다. 류세이와 나눈 메일 목록이 보였다. 맨 밑에 있는 메일부터 훑었지만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토모코는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토모코는 놀라 핸드폰을 들었다. 류세이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꿈인 걸까 싶어서 토모코는 눈을 비볐다. 눈을 비벼도 사쿠타 류세이라는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토모코는 떨리는 손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 토모코. 자? 나 지금 네 집 근처인데, 괜찮으면 잠깐 나올래?
딸꾹. 토모코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토모코는 메일을 몇 번 읽은 뒤 숨을 멈췄다. 딸꾹질은 그제야 멈췄다. 토모코는 답하지 않으면 메일이 사라질 것처럼 빠르게 답장을 했다. 짧은 문장이었다.
- 좋아요.
토모코는 침대에서 부리나케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가벼운 눈화장만 하고는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평소 집에서 입던 복장대로 나갈 수는 없었다. 고민하던 토모코는 간소한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오후 10시. 토모코의 부모님이 잠에 들 시각이었다. 토모코는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거실에서 꺼지지 않은 TV 소리가 들려왔다. 토모코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계단을 내려와서야 토모코는 숨을 내쉬었다. 혹여나 다른 메일이 왔을까 토모코는 핸드폰을 한 번 더 꺼냈다. 다행히 온 메일은 없었다. 토모코는 현관문 앞에 서서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아직 늦여름의 냄새를 벗어나지 못한, 조금은 눅눅하고 나뭇잎과 꽃향기가 밴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집 근처 가로등 아래에서 류세이가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류세이 선배!”
토모코는 나지막하게 류세이의 이름을 불렀다. 팔짱을 끼고 있던 류세이는 토모코를 바라봤고, 웃으며 팔짱을 풀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깬 건 아니지?”
“네. 이 시각엔 깨어있을 때가 많아서요.”
잠 잘 준비를 하는 시각이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류세이는 안도의 한숨을 살짝 쉬는 듯 하더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건 아니고, 운동하다가 마침 지나게 돼서. 줄 것도 있고.”
“줄 거요?”
“음……. 일단 좀 걸을까?”
얼떨결에 토모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표정을 보더니 황급하게 멀리까지는 걸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 토모코는 류세이의 손을 바라봤다. 무언가 들고 있긴 했으나, 쇼핑백이 불투명한 탓에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크기가 그리 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 무거운 건 아닌 모양이었다. 둘은 근처에 있는 놀이터까지 걷기로 했다. 토모코는 걸음을 옮기면서 류세이를 슬쩍 쳐다봤다. 가로등의 불빛 때문인지 유독 류세이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 것처럼 보였다. 토모코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다가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나요?”
“응. 우리 학교, 그때 이후로 괜찮아졌거든. 후유증이 좀 있긴 한데. 다 너희들 덕이야.”
류세이는 옅게 웃었다. 토모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에스 조디아츠 때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토모코는 정확히는 류세이가 어떻게 지내는 건지 궁금했지만, 잘 지낸다니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아, 그렇지. 너희는, 아니 토모코는 어때? 아마노가와도 그 이후로 많이 바뀌었잖아.”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부실도 새로 옮겼고, 가면라이더부도 정식 부로 인정됐거든요. 교장 선생님이랑 이사장님 자리는 아직 공석이지만요.”
“그렇구나. 미안. 안 그래도 한 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정신이 좀 없어서.”
“……그렇군요. 다른 분들은 잘 지내시나요?”
“다른 분?”
“시라카와 씨라든가, 지로 씨라든가. 잉가 씨.”
“아, 응. 지로는 재활 중이고, 곧 학교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시라카와는 뭐, 잘 지내고. 잉가랑도 가끔 연락 주고받는데 본국으로 돌아가서 잘 지내봐. 저번 일 덕분에 할 일을 찾았다고……. 그런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그, 그래?”
류세이가 토모코의 눈치를 보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토모코는 의아한 눈빛으로 류세이를 응시했다. 류세이는 잠시 토모코의 눈길을 피했다. 류세이가 뜸을 들이거나 할 말을 숨기려고 할 때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걸 토모코는 알고 있었다. 반응을 보기 위해서 토모코가 시선을 떼지 않자 류세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토모코도 바쁘지? 우리 학교 놀러오기엔 말이야. 곧 3학년이고…… 슬슬 진학 문제도 생각해야 하니까.”
아, 토모코는 짧게 소리를 냈다. 류세이는 토모코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한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신경 안 쓸 리가 없잖아요. 류세이 선배가 한 말인데.”
“어? 혹시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했어? ……그런 거라면 사과할게.”
“그건 아니에요.”
둘은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기류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침묵을 깬 건 골목 구석에서 울고 있는 고양이였다. 둘은 고양이 소리에 멈춰 섰다. 고양이는 둘 쪽 담벼락 위로 오르더니 도도하게 두 명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고양이다.”
“그러게? 털이 검어서 안 보였어.”
“내려올래?”
토모코는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는 노란 눈으로 토모코를 내려다보며 손을 가볍게 얹어 간을 보더니 훌쩍 밑으로 내려왔다. 토모코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 좋아해?”
“네. 귀엽잖아요.”
토모코는 능숙하게 고양이를 안아 류세이에게 보여줬다. 류세이는 움찔거리다가 가만히 고양이의 턱을 긁어주었다. 고양이가 기분 좋은 듯 갸르릉 소리를 냈다.
“고양이 무서워하세요?”
“아, 아니. 무서워하는 건 아니고. 할퀴지 않게 조심해.”
“저, 고양이랑 대화할 줄 알아요. 안 할퀼걸요?”
“……정말?”
“거짓말이에요.”
“에?”
토모코는 고양이를 내려놓고는 돌아서는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류세이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침묵은 조금 가벼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모코와 류세이는 놀이터에 도착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낡은 시소와 회전 기구, 그네가 덜렁 놀이터 위에 놓인 공터에 가까운 놀이터였다. 모래밭이 없는 구석에는 자판기 두 대와 벤치 두 개가 있었고, 쓰레기통과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못한 꽁초 몇 개가 보였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네에 앉았다. 류세이는 모래밭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토모코는 다시 그 쇼핑백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토모코와 만나는 길에 누군가에게 전해줄 물건이라고 토모코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날이 아직 덥다. 그렇지?”
“네. 류세이 선배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응? 왜?”
“이렇게 늦게까지 운동을 하시니까요. 수련도 하시는 것 같고.”
“아, 아. 응. 괜찮아. 익숙해져서.”
류세이는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는 바닥을 박차고 그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네 줄을 붙잡고 있던 토모코가 고개를 돌렸다.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자 류세이는 그네를 멈췄다. 류세이의 귀가 유독 빨갛게 보였다. 토모코는 고개를 갸웃했다. 류세이는 앞을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응. 어쨌든 정말 우연히 지나친 거야. 운동 나오면 가끔 다른 길로 샐 때가 있어서.”
류세이는 빠르게 내뱉었다. 그러고 나서 류세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대답이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류세이는 자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사실, 줄 것도 있었어.”
“……줄 거요?”
“별 건 아닌데, 그…….”
류세이가 그네에서 일어났다. 그네가 작게 출렁였다. 류세이는 구석에 있던 쇼핑백을 들어 토모코에게 건넸다. 자세히 보니, 쇼핑백에는 꽃집 이름이 있었다. 토모코도 언뜻 지나친 적이 있는 꽃집이었다. 크기는 작아 보여도 꽤 여러 꽃을 파는 가게 같았다.
“하교하다가 꽃집에 들렀는데 예뻐서 사 왔어.”
“저…… 주시는 거예요?”
“응? 물론이지.”
류세이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토모코는 쇼핑백을 슬쩍 열어봤다. 보라색 화분에 꽃이 있었다. 노란 꽃잎이 달빛을 보더니 활짝 피고 있었다.
“달맞이꽃이네요?”
“응. 이 시기면 슬슬 질 때가 되긴 했는데, 올해는 더워서 그런지 아직 지진 않았더라고. 왠지 널 닮은 것 같아서.”
“절 닮아요?”
“특별하잖아. 너는.”
특별. 토모코가 그 단어를 곱씹자, 류세이는 다시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응, 뭐랄까. 넌 다른 사람이랑 다르니까. 달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은 꽃이 꼭 햇빛이 있어야 핀다고 생각하지만, 아닌 것도 있으니까. 그 점이 너랑 비슷한 것 같아서.”
류세이는 말을 끊고는 수줍게 웃었다. 류세이의 시선은 꽃으로 향해 있었다. 토모코는 류세이를 바라봤다. 다른 것보다 그 마음이 좋았다. 토모코는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들어요.”
토모코의 말에 류세이가 활짝 웃었다. 류세이는 헝클어뜨렸던 머리를 정돈하다가 손을 내렸다. 류세이는 신발 위로 묻은 모래를 털어내려는지 발을 조금 움직였다. 모래는 떨어지지 않았다. 토모코는 그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더운 바람이 짤막하게 불어왔다. 류세이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토모코는 고개를 들었다.
류세이의 눈동자를, 달빛인지 가로등인지 알 수 없는 환한 빛이 감싸고 있었다. 그 안에 토모코가 있었다. 토모코가 그 광경을 마주하자, 류세이의 목소리가 명확히 들리기 시작했다.
‘이 꽃을 볼 때마다 날 생각해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토모코는 눈을 크게 떴다. 토모코의 눈에 류세이가 가득 찼다. 시선을 돌리려고 해도 류세이의 눈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피할 수가 없었다. 토모코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뒤로 물렸다. 잘못 들은 것이다. 토모코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 말은 류세이를 통해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속이는 환청이었다. 속아 넘어갈 수 없었다. 토모코는 쇼핑백의 손잡이를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슬슬…… 돌아갈까요?”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토모코는 하트 모양의 꽃잎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하다가, 겨우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류세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류세이는 무언가를 내려다보더니, 그것을 붙잡았다. 토모코의 손이었다. 류세이는 한참 무언가를 골라내는 사람처럼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만 이따가 돌아가자.”
토모코의 손등 위로 류세이의 온기가 얹어졌지만, 류세이의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얹는 것에 불과했다. 류세이는 그 행동마저 금방 그만두었다. 류세이의 손이 떨리며 바닥 주위의 허공을 배회하다가 떨어졌다. 토모코는 류세이의 손을 바라봤다. 분명 크고 고운 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손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상처가 많고 투박했다. 한 번도 자세히 보려 한 적이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뭘 보려고 했던 걸까. 토모코는 생각했다. 꿍꿍이만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엊그제처럼 느껴졌다. 토모코는 이제 류세이를 누구보다도 강하고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은 또 다르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류세이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 토모코는 온통 류세이가 바라보는 자신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류세이가 잠시 뒤로 물러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토모코는 문득 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상냥한 사람이다. 똑바로 마음을 전하려는 사람이다. 토모코는 마음속에 문장을 적어 내렸다. 그전에 적었던 문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두 문장이 추가되자 무언가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5분 정도면 될까요?”
토모코는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렸다. 5분. 노래 두 곡도 채 못 들을 시간이었고, 동시에 세상이 바뀔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토모코는 류세이가 준 꽃을 내려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질 꽃이지만, 가꾸면 언젠가 다시 필지도 모르는 꽃이었다. 사람의 마음에도 기간이 필요했다. 길지 않은 그 5분이란 시간에, 토모코는 조그마한 싹을 틔워보기로 했다. 류세이는 활짝 핀 얼굴로 대답했다.
“좋아.”
*
“류세이 선배, 그거 기억나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토모코의 말에 류세이는 토모코의 어깨에 기대던 고개를 들어 토모코를 마주 봤다. 토모코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류세이의 눈 바로 위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었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손으로 잡아 밑으로 내렸다.
“어떤 거?”
“왜, 류세이 선배가 스바루보시로 돌아갔을 때 있잖아요. 그 후에 저희 집 근처로 오신 적 있죠?”
류세이는 토모코의 말에 짧게 아, 하고 내뱉었다. 토모코는 종종 가만히 있다가도 옛날 일을 꺼내곤 했다. 즐거웠던 때뿐만 아니라 가끔은 류세이가 곤란하고 창피했던 일까지 이야기하고는 해서, 류세이는 토모코가 ‘기억나느냐’고 할 때마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지. 그런데 그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해서요. ……혹시 꽃 전해주려고 일부러 오신 거였나요?”
그렇게 말하고는 토모코는 자신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류세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토모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손을 토닥이더니 말했다.
“저기, 토모코. 내가 뭐하러 가던 방향에서 빙 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왔을 것 같아?”
류세이가 평소 등교하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 가던 길과 토모코의 집은 정확히 정 반대 방향에 있었다. 토모코는 꾸물거리며 대답했다.
“……역시 저 보러 온 거죠?”
“당연하지. 보고 싶은데 따로 만날 핑계도 없고. 그나저나. 우리 작가님은 그걸 5년 후에야 알아차린 거란 말이지?”
류세이가 가볍게 토모코의 볼을 꼬집었다. 토모코는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똑같이 류세이의 볼을 늘어뜨렸다. 류세이가 소리를 지르며 항복 자세를 취하자, 토모코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류세이는 소파 끝으로 자리를 옮긴 토모코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화났어?”
“아니요. 딱히.”
“난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냥…… 류세이 선배가 절 그렇게 좋아했나 싶어서요.”
“응. 그렇게 좋아했어.”
토모코는 류세이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류세이 또한 눈을 깜빡였다. 말없이 계속 눈을 깜빡이던 둘은 결국 크게 웃어버렸다.
“뭐예요, 그게.”
“그러게. 나 되게 웃겼다. 그래도 나 진심이었어.”
“알아요. 아, 참. 저 그 꽃, 되게 열심히 길렀어요. 대학 들어가서는 관리를 잘 못 해서 죽어버렸지만요.”
“그래? 잠깐. 그 정도면 1년 조금 넘긴 기간 아니야?”
“네. 류세이 선배가 준 거니까. 왜, 그때 그러셨잖아요. ‘이 꽃을 보면서 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내가 그랬어?”
류세이의 말에 토모코는 입을 다물었다. 토모코가 들은 건 류세이의 말이 아니라, 생각이었다. 토모코는 머뭇거리다가 보내야 할 메일이 있다며 노트북을 열려고 했다. 류세이의 팔이 토모코의 어깨를 두르며 노트북을 여는 것을 막았다. 토모코가 류세이를 올려다보자, 류세이가 시원스럽게 웃으며 토모코를 끌어안았다.
“토모코, 설마 그때 내 생각 읽은 거야?”
“그런 적, 없어요.”
“그런데 왜 내 눈을 피하실까?”
류세이가 토모코의 뺨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토모코는 샐쭉하니 류세이를 돌아봤다.
“……사실 읽긴 했어요.”
류세이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사람처럼 표정을 굳히기 시작했다. 류세이는 머지않아 눈을 크게 떴다.
“뭐?! 진짜 읽었다고?! 농담이 아니라?!”
“어제오늘 일인가요?”
“아니, 그건 그런데. 잠깐만. 그러면…… 5분만 있다가 가자고 한 건.”
“글쎄요? 왜일까요?”
토모코는 검지를 들어 류세이의 입술 위에 얹었다. 류세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토모코는 멈추지 않고 류세이가 있는 곳으로 따라갔다. 소파 반대편을 맞닥뜨린 류세이는 멈춰서 굳은 표정으로 토모코를 올려다봤다. 토모코는 눈웃음을 지었다.
“류세이 선배를 위한 문제. 달맞이꽃의 꽃말은 뭘까요?”
“…….”
류세이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토모코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모르는 건 아니었다. 꽃을 산 건 류세이였고, 설명 또한 들었다. 토모코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류세이가 그 꽃을 고른 이유 중 하나는 꽃말이었다. 세상에서 자신과 토모코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꽃말이었으니까. 류세이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소원이랑, 마법…….”
“그리고 기다림. 맞죠?”
“……그래서?”
지금부터 하나씩 설명해주겠다고 말하며, 토모코는 류세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류세이 선배가 조금만 이따가 가자고 그랬죠?”
“으, 응.”
“그래서 제가 기다렸잖아요. 그렇죠?”
그 시간 동안 둘이 한 거라고는 그네에 앉아 말없이 있던 것뿐이었다. 그뿐이었지만 류세이는 굉장히 기뻤다. 토모코가 류세이에게 시간을 떼어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토모코가 류세이의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
“전 류세이 선배의 소원을 들어준 거잖아요?”
“그러니까 네 말은, 꽃말대로 해줬다는 이야기야?”
“따지고 보면 그렇네요.”
류세이는 실없이 웃었다. 과연 작가다운 발상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그날의 기억을 지금까지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면, 선물의 가치 이상의 선물을 안겨준 셈이었다. 류세이는 자신의 품에 토모코를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5년 전의 꽃은 이곳에 없었다. 남은 것은 꽃이 가져온 순간의 기억과 설렘이었다. 그리고 류세이의 품에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꽃보다 굳건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낮이든 밤이든 토모코는 빛나고 있었다. 모두가 토모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토모코의 이야기를 사랑해주고 있었다. 그런 토모코의 꽃이 되기로 마음먹으면서, 류세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해는 지고 있었고 곧 달이 뜰 터였다. 도시의 불빛 위로 별은 모습을 감출 테지만 그 어딘가에서는 유성이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찬란한 빛을 내며 사라지는 찰나, 자신을 목격한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그건 류세이가 유일하게 부릴 수 있는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