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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코는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린코가 있었다. 어쩌면 그곳은 들판의 한가운데가 아닌 끄트머리거나 가운데도 끄트머리도 아닌 위치였을지도 몰랐다. 린코는 발을 움직였다. 억새 줄기만이 남아 허무하게 흔들리는 그곳에서 린코는 하염없이 걸었다. 희망이랄 것도, 절망이랄 것도 없는 장소. 남은 것은 걷는다는 행동 말고는 없었다. 어느 정도 걸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다리가 아프기 시작하던 순간 린코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린코의 키와 비슷한 정도의 지름의 달이 그곳에 있었다. 린코는 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곳 말고는 다른 빛이 없을 것 같았다.

‘저곳으로 가야 해.’

빛이 존재하는 곳으로 따라. 린코는 계속해서 걸었다. 달이 있다는 사실이 린코를 걷게 했고,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달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기만 했다. 린코는 다리가 아플 즈음 다시 멈췄다. 동료가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하루토, 코요미, 슌페이, 니토, 그리고 와지마 씨. 린코가 이름을 하나씩 읊자, 그들과의 기억을 되살렸다. 린코는 뒤를 돌아봤다. 동료들과 동료들이 있을 곳은 보이지 않았다. 어둑한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일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인가? 그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린코는 고개를 돌려 들판에 덩그러니 놓인 작은 달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달이 있는 방향을 향해 불었고, 줄기만 남은 억새는 달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억새가 바스러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린코는 뒤로 주춤 물러서며 손을 내렸다. 문득, 잡히는 것이 있었다. 린코는 그것을 잡고 바라보았다. 권총이었다. 경찰로 일하면서 위험할 때 항상 몸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였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쓸 때마다 인간의 무력함을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시민을 지키는 것은 린코의 ‘희망’이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은 린코는 망설였다. 달 쪽으로부터 불길한 느낌이 전해졌지만 쏜다는 판단이 옳다고 할 수는 없었다. 린코는 원을 그리며 천천히 달을 향해 움직였다.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시간을 죽일 수 없었다. 린코는 손으로 권총을 받치고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 두 발, 세 발. 총알이 달에 박히자 균열을 일으키며 깨졌다. 마치 안이 텅 빈 구체의 껍데기가 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알이 깨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무슨…….”

달의 안쪽에서 강렬하고 뜨거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린코는 뒤로 물러났지만,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린코는 달이 이곳에 있던 그때부터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린코는 권총을 고쳐 들었다. 뜨거운 바람이 린코를 강타했다. 린코는 바람에 밀려 뒤로 밀려났다. 장애물도, 부딪힐 구조물도 없었다. 바람도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린코는 끝도 없는 끝을 향해 날아갔다.

 

*

 

겨우 꿈 하나로 그날 일을 다 망칠 정도라면, 과연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린코는 목 뒤를 문지르며 면영당을 나섰다. 면영당의 멤버 모두가 괜찮냐고 한 번씩 물을 정도라면 누가 봐도 컨디션이 안 좋다는 뜻이었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말이지. 린코는 중얼거렸다. 이대로 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면 서장에게 더한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했다. 면영당 사람들에겐 우선 게이트와 팬텀 수색을 해보겠다고 했으니 그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안 그래도 조사를 나서던 참이었기에 린코는 마을 주변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날씨 참…….”

린코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이 하늘 위에서 린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이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니. 린코는 손등으로 눈을 한 번 스윽 닦아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태양을 너무 오래 바라본 탓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린코는 누가 볼 새라 급하게 아무도 없는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불길한 꿈을 꾼 게 어언 며칠인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 꿈을 꾸고 나면 잠은 다 잔 거라고 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였다. 같은 꿈이라기보다, 소설을 조금씩 나누어 읽는 것처럼 꿈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바람 소리를 들었고, 그다음에는 들판을 걷고 있었고, 또 그다음에는 들판에 있는 달을 발견했다. 최근에는 달을 총으로 쏘는 꿈을 꾸었다. 결국, 깨진 달 안에 무엇이 있나 확인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린코는 자신이 무얼 바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불길하다고 생각하면 꿈을 꾸지 않기를 빌어야 하는데 뒤의 내용을 궁금해하다니.

“잘 안 되네.”

린코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불안해서 그런 것이다. 불안해서. 린코는 끊임없이 자신을 위로했다. 생각해보면 꿈을 꾸기 시작한 건 하루토가 피닉스를 태양에 가둬놓은 시점부터였다. 하루토는 린코를 생각했는지 덤덤하고 상냥하게 이제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린코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피닉스가 언제 그곳을 빠져나올지 알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불안 탓이었다. 린코는 인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팬텀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하루토도 코요미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린코는 확인하고 싶었고, 만약 인간성을 지닌 팬텀이 있다면 그들을 구하고 싶었다. 마법사의 방식이 아닌 경찰의 방식으로. 그리고 그 믿음은 피닉스에 의해 철저히 무너졌다.

그걸 과연 무너졌다고 해도 되는 걸까. 무너졌다는 건, 그 전에 무언가가 세워졌다는 뜻이었다. 믿음을 세운 건 린코였다. 그 누구도 그 믿음에 대해서 비웃지 않았지만, 린코는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믿었다. 정말로 믿었다. 피닉스가 가방을 주워줬을 때, 린코가 내민 도넛을 먹었을 때.

“대체 맛도 모르면서 왜 먹은 거야……!”

린코는 속마음을 토해냈다. 겨우 그것 때문에 믿어버렸다. 피닉스에겐 아무렇지 않게 한 변덕이었던 것일까. 만약 피닉스의 선택이 파괴가 아니었더라면, 린코는 정말로 절망해버린 후지타 유우고의 마음이 피닉스에게 남아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피닉스에게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하루토가 린코에게 그랬던 것처럼.

린코는 울음과 함께 숨을 삼켰다. 삼킨 숨 끝에 꽃향기가 섞여 들어왔다. 린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린코의 주위로 꽃들이 놓여 있었다.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지타 유우고도, 피닉스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이 별에 남은 린코의 주위에 있던 건 이름 모를 붉은 꽃이었다.

 

*

 

바람이 멎었다. 린코는 몸을 추슬렀다. 타들어 갈 것 같은 공기가 들판 위를 지나고 있었다. 린코는 옷을 털고 고개를 들었다. 들판 위에 놓였던 달은 해가 되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린코가 알고 있는 이였다.

“피닉스.”

린코는 나지막이 말했다. 피닉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태양의 안쪽으로부터 걸어 나왔다. 피닉스는 소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구상에서 살 수 있게 된 것도 아니었다. 네게 피날레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하루토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게이트가 이미 절망한 그 순간을 지나 태어난 팬텀에게 피날레를 선사하는 것은 하루토의 망자를 향한 마지막 예의이자 애도였고 산 자들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는 건 피닉스가 하루토의 선에서도 용서할 수 없다는 행동을 했다는 의미였다. 피닉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린코가 달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 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던 것과 달리, 피닉스는 너무나도 쉽게 린코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린코는 떨어진 권총을 주웠다.

“오지 마.”

린코는 경고했지만, 린코는 피닉스에게 경고가 통하지 않으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대로 피닉스는 린코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터벅거리며 걸어왔다. 린코는 권총을 들었다. 총구가 태양과 피닉스의 머리 사이를 헤매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던 피닉스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던가?”

린코는 발을 뒤로 물렸다. 총구는 피닉스의 머리를 향해 있었다. 피닉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린코 쪽으로 다가와 총구를 자신의 이마를 향해 들이댔다. 린코는 손을 떨었다. 그래도 총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얼른 끝내고 싶은 거잖아?”

“그래. 끝내고 싶었어.”

답을 내리고 싶었다. 그때 했던 건 최선이었다고. 시간을 돌릴 수 있대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고. 가능성은 처음부터 닫혀 있었다고. 그러니 더는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린코는 고개를 떨궜다. 린코의 발치로부터 어느 꽃집에서 보았던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태양의 열기에도 굴하지 않고 꽃은 자신의 세력을 늘려가고 있었다. 린코는 고개를 들었다. 꽃의 이름이 거품처럼 떠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고마웠어.”

진심으로. 린코는 작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뿐. 린코에게는 나아가야 할 길이 있었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가려진 시야로 피닉스의 얼굴이었다. 미소였다. 린코는 그 미소를 지우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 태양의 빛은 영원히 사그라들었고 꽃이 지는 풍경 또한 린코는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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