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rth
w. 카스티안
카가미 히이로는 메스를 건네받아 눈앞에 누워있는 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어도 되는지 따위의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뜻 들여다본 심연에 틀어박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의사가 처음 맡은 환자가 하나야 타이가였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찰나였을 뿐, 히이로는 두 손을 들었다. 손가락을 꽉 죄는 얇은 장갑 너머로 쥔 메스가 벌써 피에 물들어있는 것 같았다. 눈동자를 태울 것처럼 밝은 빛 아래에서 천재 외과의는 낮은 목소리로 수술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수술을 시작한다.”
아마 카가미 히이로의 인생 중에서 가장 절박하게 환자의 생명에 매달렸을 수술의 시작이었다. 머뭇거림 하나 없이 가슴에 메스를 댄 히이로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숨을 내쉬며 그대로 내리그었다.
“그동안의 무례,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하나야 선생님. 단어를 내뱉은 후 찾아온 짧은 적막은 뒤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금세 자취를 감췄다. 고마운 일이었다. 5년간의 고통이 축적되기라도 한 듯 제 존재감을 뽐내는 흰 머리카락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히이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를 툭 치며 우스갯소리를 건네는 키리야나 환하게 웃고 있는 이들을 뻣뻣한 표정으로 훑던 히이로의 눈동자가 병실 문을 향했다. 잠시 떨린 몸의 반응을 어깨에 손을 걸치고 있던 키리야가 바로 눈치챘지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키리야와 그는 다른 의미로 깊은 관계였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히이로를 여러모로 가장 잘 이해해줄 사람일 터였다. 시끌벅적해진 소음을 틈타 키리야는 고개를 숙여 히이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저도 모르게 한껏 들이마신 산소에 숨이 턱 막혔다.
“그 녀석이라면 CR에 있을 거야.”
이어지는 말 없이 키리야는 어깨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어떤 의미로 한 말이었을까. 키리야와 그의 관계에 히이로가 낄 자리는 없었으니 무어라 말을 해줄 수 없었지만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찌릿찌릿했다. 보조개가 팰 정도로 웃어 보인 키리야가 턱짓했다. 가봐. 그렇게 움직이는 입술을 다 보지도 않은 채 히이로는 조용히 병실을 뒤로했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에 탄 히이로의 손에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있었다. 유명한 파티시에가 운영하는 카페였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는 케이크가 거의 남아있지 않는 가게였지만 히이로가 살 수 있는 케이크가 한 조각 남아있었다. 허옇게 부르튼 입술을 연신 깨물며 케이크 상자를 받아든 히이로는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엉망으로 넘긴 채 CR로 향했다.
“…….”
CR은 불이 꺼진 채였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불이 꺼진 CR은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평소라면 시간에 상관없이 신작을 개발하느라 바쁠 터였으나 오늘따라 게임기도 꺼져있었다. 빨리 뛰어온 탓에 입안에서 단내가 났다. 그리고 순간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쓸데없는 짓이었나.”
“뭐가 말인가요?”
바로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히이로가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지지직거리는 잔상을 남기며 나타난 단 쿠로토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숨죽여 웃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쿠로토를 올려다보려던 히이로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고개를 내리깔았다.
“잘 돌아왔다고 하면 될까요?”
쿠로토는 느긋하게 히이로의 옆을 지나쳐 의자에 걸터앉았다. 한때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그는 인간처럼 발소리를 냈다. 앞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모습을 한 버그스터는 어둠 속에서 희게 웃었다. 가늘게 뜬 눈동자가 이채를 띄웠다.
“날 보러 온 거 아니었나요? 그렇게 숨이 찰 정도로 뛰어올 줄은 몰랐는데.”
신을 자청하는 이답게 오만한 말투가 조롱으로 들렸다. 얼굴에 열이 확 뻗치는 것을 느끼며 히이로는 자신을 뚫어질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을 외면했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충동으로 찾아온 것뿐이었지만 히이로는 그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쿠죠 키리야는 저도 모르는 충동을 어떻게 읽어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턱까지 차오른 숨을 들키지 않으려 호흡을 죽였다.
“하나야 선생님의 수술은 잘 끝났나 보네요.”
“……그래.”
쿠로토가 물 흐르듯 말을 돌리자 히이로는 참았던 숨을 소리 없이 내쉬며 간신히 대꾸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헤매면서도 히이로의 목소리는 떨림 하나 없었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을 손가락의 떨림 역시 다른 손으로 가린 상태였다. 그 대답에 쿠로토는 빙긋 웃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머그컵을 끌어온 쿠로토는 식어 빠진 커피에 입을 댔다.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소리 내어 삼키자 히이로의 몸이 퍼뜩 떨리는 것이 보였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 아래 감춘 이로 머그컵을 가볍게 깨물었다.
“할 말이 있어 온 것 아닌가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히이로는 방어적으로 한쪽 팔로 다른 쪽 팔을 감쌌다. 부르튼 입술이 처연하기까지 해 쿠로토는 짐짓 안쓰럽다는 표정을 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가 그걸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만 할 건가요? 히이로 군.”
“……!”
퍼뜩 튀어 오르듯 몸을 움찔대며 이쪽을 돌아본 눈동자가 크게 뜨여있었다. 털을 세운 고양이 같군, 그래. 쿠로토가 나른하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좀 더 괴롭히면 어떻게 되려나. 심술궂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이렇게 단둘이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안 그런가요, 히이로 군?”
“……나는.”
키리야가 가져다 두었을 각설탕을 하나 집어 커피에 떨어뜨린 쿠로토가 재미있다는 듯 턱짓했다. 하지만 히이로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퐁당, 퐁당. 깊게 가라앉은 적막 속에서 물소리가 잔잔하게 퍼졌다.
“히이로 군이 먼저 말하지 않겠다면 내가 먼저 물어볼게요. 사실 궁금한 게 많았거든요.”
히이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원래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눈동자가 여전히 떨리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케이크 상자도 줍지 못할 정도로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쿠로토가 히이로를 히이로 군이라고 마지막으로 칭한 것은 그가 소멸하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천재 외과의. 신의 손의 아들.
단 쿠로토는 카가미 히이로에 대한 서류를 훑으며 두 단어로 그를 정의했다. 꽤 대단한 것 아닌가? 옆에서 파라드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흘려들으며 손가락 끝으로 카가미 히이로라 적힌 글자 위를 톡톡 쳤다. 새파랗게 어린 도련님은 끔찍하게 아꼈던―단 쿠로토는 모모세 사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서류 속 내용을 단박에 부정했다―여자 친구의 죽음에 분노해 가면라이더가 되길 바란, 단순한 이였다. 타오르는 불꽃의 옆에서 적당히 부채질하고 기름을 끼얹어줄 다른 이를 데려오면 쉽게 타버릴 사람. 그래서 카가미 히이로와 깊은 관계가 되었을 때, 옆에서 색색거리며 무방비하게 잠든 헤이즐넛 색 머리카락을 쓸며 단 쿠로토는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그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곱게 휘며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단 쿠로토는 자기 생각을 반추하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눈동자에 배신당했다는 분노와 슬픔으로 물들고 소멸하는 모습을 덤덤하게 담던 그 일련의 과정까지도 단 쿠로토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내가 돌아온 게 싫었나요?”
인간이 아니라 버그스터로 생환했을 때 카가미 히이로의 표정은 어떠했는가. 잠시 커졌던 눈동자는 금세 잦아들어 고요한 수면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일렁임 하나 없는 그 반응에 심기가 불편해져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를 걸고넘어졌지만, 히이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눈앞의 히이로의 모습은 쿠로토에게 신선하기 짝이 없었다. 참을 수 없이 즐거워진 탓에 입매를 당겨 웃었다.
“나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잘도 내 아비의 밑에 들어갔군요. 그렇게―그 여자가 중요했습니까?”
그 여자, 단어를 내뱉자마자 히이로는 어느새 뒷걸음쳐 간식이나 커피 따위를 올려둔 책상 위를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아슬아슬한 살얼음을 깨뜨린 소음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쿠로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프로 간단하게 움직일 수 있음에도 쿠로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치 안심하라는 듯 발소리를 내며 한 발짝 다가섰다.
“나를 닮은 내 아비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그 여자의 목숨을 구걸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요?”
“……읏.”
히이로는 다가오는 쿠로토를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잖아요. 가까이 다가온 쿠로토가 손을 뻗어 입술을 만지려는 찰나, 히이로가 강하게 그의 손을 쳐냈다. 그래 봤자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적나라하게 비친 거부 의사에 쿠로토는 입술을 비뚜름하게 틀었다.
“내 아비가 우리 관계를 알고 있었을까요? 그런 이야기는 안 했나요? 어서 대답해봐요, 히이로 군.”
“……네게, 대답할 의무 따위…….”
“있죠. 히이로 군은 내 연인이잖아요.”
옅게 부어오른 손등을 무시한 쿠로토가 검지로 히이로의 턱을 위로 끌어올렸다. 충혈된 눈동자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에 엉망으로 부르튼 입술에는 핏방울까지. 아무렇게나 자라난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며 쿠로토가 고개를 숙여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섰다.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것이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예전처럼 쿠로토 씨라고 불러주지 그래요? 지금은 아무도 없는데.”
“내가 왜, 읍!”
여기까지 와서 키스 허락을 받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쿠로토는 그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손을 뒤로 뻗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게걸스럽게 그의 입술을 삼켰다. 도망가지 못하게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채로 혀로 입안을 유린하자 아래 깔린 몸이 바르작거렸다. 한 모금 마셨던 커피가 히이로에게 쓰게 느껴졌는지 미간도 잔뜩 찌푸려진 상태였다. 아까 각설탕을 몇 개나 넣었는지 생각하며 쿠로토는 한참이나 입을 맞췄다.
“난, 이제 당신의 연인 따위가 아니야…….”
숨을 고르라는 것처럼 여유롭게 입술을 떼어냈다가 다시 다가오려는 것을 막으며 히이로가 꽉 졸린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말은 가냘프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언제부터 자신이 그와 연인 사이가 아니게 되었지? 물기로 흐려진 시야에 담긴 쿠로토의 얼굴을 응시하며 히이로는 살짝 부풀어 오른 입술을 거칠게 손등으로 훔쳐냈다.
그딴 건 정해져 있었다. 그가, 자신을 배신했을 때.
“왜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해요?”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날 선 대꾸에도 쿠로토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에 무어라 말하려는 히이로의 입술을 제 입술로 막은 쿠로토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히이로 군이 왜 내 아비의 개를 자처했는지 맞춰볼까요? 그 여자가 그만큼 소중해서? 아닐걸요? 다른 이유가 있었잖아요?”
“그런 것, 아니야…….”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맞닿은 부분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발버둥 치며 히이로가 제 품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막은 쿠로토가 얄궂게 웃었다.
“나도 이렇게 살아났으니 그 여자도 나처럼 살려내려고 했던 거잖아요? 물론 그녀가 소중해서가 아니겠죠. 나에게서 도망가려고 했던 거죠?”
“내 마음을 멋대로 재단하지 마라, 단 쿠로토.”
“그거 아나요, 히이로 군?”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둥글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하얗게 드러난 송곳니에 입술을 깨물린 히이로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냈다. 세게 깨문 탓에 배어 나오는 핏방울을 입술로 지워내듯 문지르며 쿠로토가 낮게 속삭였다.
“히이로 군은 거짓말을 할 때면 입술을 파르르 떨어요. 그것도 귀여우니 상관없지만, 아, 설마 몰랐나요?”
핏자국이 선연하게 남은 입술을 올려 콧등을 지나 뺨, 이마에 입을 맞추며 쿠로토가 야살스럽게 미소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물기 어린 눈가에 입을 마주 대자 피가 허옇게 질린 눈가에 묻어났다.
“어차피 도망가지도 못할 텐데. 가만히 보면 히이로 군은 엉뚱하게 움직일 때가 있어요.”
“나는, 그런 게 아냐……!”
또 입술이 떨리는데요. 들릴 듯 말 듯 속삭여주며 쿠로토는 멎은 상처를 다시금 깨물었다. 완전히 사라졌으니 이제 정말 도망 못 가겠네요. 귓가를 메운 목소리에 히이로가 손을 들어 쿠로토의 멱살을 잡아챘지만,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행동이었다.
“당신 같은 거, 난…….”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뻔히 알 것 같았지만 쿠로토는 그의 말을 막지 않았다. 정말 싫어. 차마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움직이는 입술을 읽어내며 쿠로토가 환하게 웃었다.
“히이로 군이 날 싫어해도, 나는 좋아하니까요.”
다가오는 입술의 감촉에 익숙함을 느끼며 히이로는 멱살을 쥔 손에서 서서히 힘을 뺐다. 그가 말한 것들의 어떤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역류하는 파도 속에서 눈을 감은 히이로는 손을 틀어 손목을 강하게 낚아채 손톱을 세웠다.
……당신이 싫어.
들리지 않을 본심을 담은 생각을 되풀이하며 히이로는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젖은 눈꺼풀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