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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ckmate

 

w. 카스티안

 

조용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서류를 훑고 있던 토키와 소고는 소리 없이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두었다. 책상에 널브러진 서류를 손등으로 쓱 밀어 바닥으로 치웠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서류들이 짙은 목재 바닥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보고 있던 소고는 시선을 돌려 방을 훑었다. 따로 지시하지 않았건만 어디서 구해온 건지 흑단으로 만든 가구로 집무실을 채운 덕에 은은한 목향이 코를 간질였다. 매끄럽게 코팅된 책상을 손가락을 세워 느리게 쓸었다. 먼지 하나 없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사치스럽네…….”

거의 일주일 만에 사용하는 방인데도 불빛에 반사가 될 정도로 깔끔하다. 미리 이 방을 쓰겠다고 말해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왕의 충견은 마왕의 손길이 닿는 곳에 한 치의 더러움을 용서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소고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듦과 동시에 눈에 거슬렸다. 일부터 손톱을 세워 책상을 긁었지만 변신하기 전의 모습으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린 소고는 책상 끝에 밀어두었던 체스판을 끌어왔다. 흑단을 닮은 눈동자가 어지러운 체스판 위 말들을 응시했다. 얇은 손가락이 흑색 폰을 집었다.

 

 

50년 후 너는 세계를 멸망시킬 최저최악의 마왕이 될 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처음 보는 기체를 타고 내려온 제 또래의 소년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선언했다. 눈만 껌뻑대다 고개를 갸웃하자 소년은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을 반증하듯 표정 관리도 못 한 채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오, 들어본 적 없는 단어는 그에게 있어 증오 그 자체 같았다. 이를 악다물고 내뱉는 얼굴이, 말투가 꾹꾹 누른 증오와 분노를 담아냈다.

“내가, 마왕이 된다고?”

토키와 소고는 이 순간 가장 자연스러울 의문을 던졌다. 소고는 소년과는 달리 감정을 감추는 법에 능숙했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경악을,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당혹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쉴 새 없이 꼼지락대는 손가락을. 소년은 물론 뒤따라온 소녀 역시 쉬이 넘어갈 정도의 연기였다. 딱 한 명을 제외하고.

“나는 널 경애해, 나의 마왕.”

고풍스러운 벨벳 쿠션 위에 드라이버를 건네며 속삭이던 간드러진 목소리는 소고가 지금껏 들어본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인간이기는 하려나. 토키와 소고는 본능적으로 그는 자신의 연기에 속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지않아 갈 곳을 잃어버릴 적대감만 가지고 있는 소년과 채 버리지 못한 온정으로 갈팡질팡하는 소녀와는 달랐다. 하지만 심연을 닮은 남자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가늘게 뜬 눈동자가 저를 가늠한다는 것을 안 남자는 야살스럽게 웃었다.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충성심을 보여줄 수 있어.”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서늘한 숨결이 뺨을 스쳤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맞닿은 속눈썹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그에게 보이지 않을 입술이 빙그레 호선을 그렸다.

“……그건, 꽤 마음에 드네. 네 이름은?”

“워즈라고 불러주면 고맙겠어, 나의 마왕.”

마치 제 원래 이름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 모양새에도 소고는 그저 웃기만 했다. 너그럽게 용인하겠다는, 오만한 태도에 워즈 역시 웃었다. 뺨에서 멀어진 온기가 손등에 닿는 것을 보며 소고는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의미 없는 감상에 젖어있었다. 소고는 흰색 룩을 움직여 하나 남아있던 흑색 룩 앞에 섰다. 그리고 살짝 움직여 흑색 룩을 쓰러뜨렸다. 별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흑색 룩을 옆으로 치운 소고는 턱을 괴었다. 판도는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흑진영은 킹과 퀸 그리고 두 개 남은 폰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폰마저도 프로모션을 시도할 도 없는 절망적인 판도였다. 끔찍한 적막 속에서 소고는 옆에 있던 작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은하수를 고운 모래에 새겨둔 것처럼 반짝이는 모래가 바닥에 쌓이는 것을 외면하며 흑색 폰을 집었다가 멈칫했다.

“워즈.”

폰을 집은 손을 그대로 멈춘 채 소고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거의 들리지 않을 속삭임이었으나 기다렸다는 것처럼 머플러를 타고 방에 넘어온 워즈가 고개를 숙였다. 다른 부하와는 다른 가벼운 인사였다. 입매를 당겼다.

“방이 너무 삭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워즈는 눈을 내리깔아 속눈썹으로 눈동자를 가렸다. 잠시 그는 대답이 없었다. 매뉴얼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빠르게 대답을 내놓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이 꽤 즐거운 유희처럼 느껴져 소고는 그를 머리부터 쭉 열기 띈 눈동자로 훑어내렸다. 가지런하게 땋은 옆머리를 내려온 눈길에 담긴 창백하리만큼 파리한 안색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많이 피곤해?”

소고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우스운 질문이었다. 소고는 그가 왜 피곤함에 시달리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워즈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팔뚝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던 소고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몇 마디 더 하려다 이 이상 괴롭혔다가는 무언의 질타라도 할 것 같아 소고는 오랜만에 찾은 유희를 그만두기로 했다.

“투구꽃이나 은방울꽃이 좋을 것 같아.”

석산도 나쁘지 않겠네. 흘리듯 답을 건네주자 워즈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영민한 충견은 그 꽃이 무슨 꽃인지 안 모양이었다. 멸종 위기라는 흑단에 둘러싸인 마왕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독초에 파묻힐 제 모습을 떠올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움 속에 숨겨져 있던 독을 뿜어낼 테지. 최저최악의 마왕은 곱게 눈동자를 접으며 마지막 명령을 하달했다.

“이건 한 송이면 충분할 것 같아.”

소고가 서랍에서 꺼낸 타블렛 화면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미에 어둠을 본뜬 것 같은 꽃이 피어있었다.

“……명 받들지.”

잿빛 연기를 닮은 머플러가 살랑이는 바람을 일으키며 워즈를 삼켰다. 부유하는 유령처럼 사라지던 모습에서 평소와 달리 어정쩡한 걸음걸이를 본 소고는 경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즉흥적인 명령에도 워즈는 빠르게 움직여 다음날 집무실을 꽃으로 가득 채워두었다. 건네준 꽃을 돋보이게 해줄 꽃망울이 터지지도 않은 것들로 장식한 방은 멋들어지게 보였다. 어지러이 섞인 목향과 꽃향기에 취할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어제 두다 만 체스판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이미 바닥에 전부 쌓인 후였다. 그리고 그 옆에 검붉은 장미가 놓여있었다. 방금 꺾어온 것처럼 싱그러운 상태였다. 가시는 제거하지 않은 듯 우스운 위협을 돋보이는 장미를 맨손으로 쥐어 코에 가져다 대었다. 조화는 아니었지만, 꽃향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향기를 내뿜어 벌과 나비를 꾀어야 할 꽃에 향기가 없으니 불완전한 꽃이었다.

“……아.”

알싸한 아픔이 느껴진다 했더니 손가락에 가시가 박혔다. 천천히 장미를 내려두자 박혔던 가시가 빠져나가며 핏방울이 몽우리처럼 맺혀 크기를 키웠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던 소고는 제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널 부른 기억은 없는데.”

날이 선 말과는 달리 즐겁다는 말투였다. 고작해야 가시에 찔린 상처에 부름도 없이 달려온 모양새라니. 어젯밤에는 무리를 시키지도 않았건만 새하얗게 질린 기색이었다.

“……치료해야 해.”

“가시에 찔린 거 가지고?”

최저최악의 마왕이 이런 거로 죽겠어? 유쾌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워즈는 잠시 머뭇댔다. 크기를 키우다 한계를 넘은 핏방울은 하얀 손가락을 타고 얇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닦아내지 않자 손가락 끝에 도달한 피가 체스판에 떨어져 작은 원을 그렸다. 우연하게도 어제 룩을 무너뜨린 곳이었다.

“귀찮은 건 싫어.”

소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 뜻을 읽은 워즈의 가는 입술이 잘게 경련했다. 어서. 답지 않게 다음 행동을 종용하자 워즈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려 피가 타고 흐른 손가락에 혀를 내밀었다. 축축한 감촉에 소고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모두가 워즈처럼 내 말을 잘 들어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혀로 핥는 모양새가 개를 보는 것 같았다. 말과는 다르게 소고는 워즈를 닮은 다른 이는 필요 없었지만.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려다 그만둔 소고는 손가락을 뒤로 물렸다. 타액으로 질척대는 것으로 그의 입술을 죽 긁었다.

“이건 네게 줄게.”

손가락을 뗀 소고는 이번에는 가시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장미를 쥐어 워즈에게 내밀었다. 받아도 좋아. 재차 고개를 끄덕여주자 워즈는 흠칫 떨던 손을 올렸다. 물론, 소고는 장미를 그의 손 위에 올려줄 생각이 없었지만.

“……읏.”

그의 손을 지나간 장미는 훤히 드러난 그의 옷 사이에 파고들었다. 가차 없는 손길이었다. 우악스럽게 쑤셔 넣은 탓에 날카롭게 잘린 꽃대며 가시에 긁힌 살갗에 피가 송송 맺히는 것이 보였다. 워즈가 눈을 질끈 감는 것을 감상하며 소고는 살풋 웃었다.

“돌아가도 좋아.”

용건은 이거로 끝이라는 걸 보여주듯 소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체스판 위 흑색 퀸을 잡았다. 뒤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가 사라졌다. 흩어진 연기의 자흔을 느끼며 잡은 흑색 퀸을 움직여 흰색 킹 앞에 탁 소리 나게 내려두었다. 웃음을 띤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체크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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