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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로컬명 사용.

그건 한창 악귀환월의 수하들과의 전투가 길게 이어지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모두가 함께 한 걸음씩 악귀환월을 물리칠 길로, 동시에 라스트 닌자의 길로 들어서고 있을 여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악귀환월의 요괴가 나타나지 않는 날에는 일상의 일들과 수련을 반복하던 모두의 가운데, 쌓여가는 일들에 결국 지쳐버린 꽃비가 이틀째 악몽에 시달리다 새벽녘에 깨어나던 때였다. 퀭해진 얼굴로, 주말에도 어김없이 새벽녘에 약간의 비명과 함께 깨어난 꽃비의 앞에 진수가 앉아 있었다. 아악, 깜짝이야.

 

“비명 소리가 들려 보러 왔소이다. 놀라게 했다면 죄송하오, 꽃비 낭자.”

“아, 아니에요.”

 

어둠에 익숙해진 꽃비의 두 눈에 걱정 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 진수가 들어왔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사실 괜찮지도 않고 말이지.

 

“악몽에 시달리시는 게 아닐까 지레짐작을 하기는 했지만 진짜일 줄은 몰랐소이다.”

“알고 있었어요?”

 

저만 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말에 모두에게 걱정을 끼쳤다고 생각한 꽃비가 머쓱한 듯 웃었지만, 아마 꽤 힘들었을 것이다. 진수가 그런 꽃비에게 따뜻한 컵을 하나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카모마일 차이올시다. 숙면에 도움을 준다고 해서 아침에 드릴까, 하고 끓이고 있던 참에 꽃비 낭자의 비명이 들려 함께 가지고 왔소이다.”

“어쩐지, 좋은 향이.”

 

따스한 연기, 그 속에 피어나는 꽃의 향기만으로도 꽃비는 꽤나 긴장된 정신이나 몸이 나른하게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끓인 지 얼마 되지가 않아 뜨겁다는 진수의 말에 천천히 식힌 꽃비가 차를 한 모금 목으로 넘긴다.

 

“맛있어요.”

“그렇지요? 스트레스에도 꽤 효과가 좋으니 꽃비 낭자에게 딱 맞는 차인 것 같았습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진수 오빠는 참 친절한 것 같아요.”

 

꽃비의 말에 한참을 아무런 말없이 멈춰있던 진수가 그렇냐는 질문만 슬쩍 남겨 놓는다.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꽃비가 차가 든 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이내 웃으며 진수를 마주한다.

 

“이 차도 그렇고요. 제가 악몽에 시달리는 걸 알고 있어서 준비하고 계셨다고 했잖아요? 비명 소리가 그렇게 컸던 것도 아닌데, 주방에서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을 텐데 금방 여기까지 와주시고, 감사해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꽃비 낭자가 제게 친절하시니, 그것에 보답을 해드리고자 했을 뿐이옵니다.”

 

제게 가족이라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 것도, 어쩌면 저는 여러분의 가족이 아닌지라 이렇게 못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될 때마다 꽃비 낭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저를 이끌어줄 때도 분명 있었으니 말입니다.

 

왠지 칭찬에 쑥스러워진 꽃비가 멋쩍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더 목으로 넘겼다. 이 늦은 새벽까지 저를 위해 이 차를 준비하고 있었을 진수를 생각하니 원래도 맛있던 차가 꿀이라도 한껏 담은 듯 달디 달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잘 마셨습니다!”

“일단 주무시지요. 차를 마신 후에도 악몽이 계속 되면 당분간 계속 잠들기 전에 차를 마시도록 하십시다.”

“네!”

 

비어 있는 컵을 꽃비에게 받아든 진수가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꽃비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 저기.

 

“고마웠어요. 늦은 시간까지 차를 준비해주신 것도, 여기까지 한 걸음에 달려와 주신 것도요. 차를 마셔서도 있지만, 진수 오빠 덕분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정쩡하게 서서 꽃비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던 진수가 천천히 일어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꽃비 낭자가 푹 주무실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뭐든 해드릴 테니, 걱정 내려놓고 푹 주무시오.”

“안녕히 주무세요.”

 

꽃비의 방을 나선 진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신 부채질을 이어갔다. 정말이지, 걱정을 한아름 안고 달려온 것도, 차를 가지고 온 것도, 그 짧은 순간의 판단이었지만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만 웃음이 나는 것도 꾹 참고서 주방으로 돌아갔다. 꽃비의 방으로 달려오기 직전 끈 가스 불 위에 남은 주전자 속 차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고, 진수는 그 차를 비어있는 병 안에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어둔 후 늦은 잠을 청하러 돌아갔다. 온 주방이 꽃향기로 가득하다. 이 새벽이 꽃향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어쩌면 두 사람의 코끝에는 꽃향기와 함께 달디 단 향기도 가득 차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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